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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Macedonia)

108. 고마운 오흐리드의 조선소

  드디어 오흐리드(Ohrid)에 입성하는 날이다. 제법 높은 산을 세개나 넘었고, 진눈깨비를 맞으며 간만에 100km 이상 주행하는 등 쉽지않은 길이었다. 특히 호수가 멋지다고 많은 추천을 받은 곳. 과연 얼마나 좋은 곳일까?

  하지만 호수에 대한 기대보다는 자전거 가게를 찾아 프론트 랙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Wing의 앞바퀴는 계속해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항의하고 있다. 진흙이 튀어서 더러워진 운동화도 빨아야한다. 주섬주섬 텐트를 정리한다.

  지도 상으로는 호수 근처인데 호수는 보이지 않고, 멀리 큰 산과 모스크만 보인다. 계속 가 보자.

<오흐리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모스크 ><오흐리드는 개한테도 벽돌집을 지어주네?>

  길가에 조그만 조선소가 보인다. 엄밀히 따지면 조선소는 아니다. 각종 덕트 등 철판을 가공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는 내륙국가인데 왠 조선소?

  설마 호수에 띄우려고 보트를 만드는건가? 

<작은 보트를 만들던 조선소>

  조금 더 가니 마침내 오흐리드 구시가지가 나타났다. 시가지는 오전이라서인지, 주말이라 그런지 붐비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차분한 분위기의 오흐리드><광장의 분수대. 그리고 어디서나 보이는 마케도니아식 모스크>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니 드디어 호수가 나타났는데, 와!

  이건 생각보다 훨씬 큰 호수다. 커다란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호수에는 갈매기가 날아다니며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어서 바닷가에 온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숫가의 큼지막한 앵커>

  호숫가에는 잔디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오흐리드 호수에 반해, 벤치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공원. 마케도니아의 동상사랑은 오흐리드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 우선 급선무는 숙소를 정하는 일.

  Bojan은 구시가지에서 어슬렁거리면 호객꾼들이 나타날거고, 5유로 정도면 방을 구할수 있을거라고 했다. 가이드북에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는데 호객꾼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한 구조의 주택.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와 비슷한 느낌이다>

  구시가지 골목길로 접어들자 숙소가 많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같이 1박에 15유로 이상을 부르는게 아닌가? 저렴한 방을 물어보니 지금은 시즌이 아니고, 10유로 이하에는 절대 방을 구할 수 없을거라고 한다. 원래 비수기면 더 저렴해야 하는거 아니야?

<여기는 발코니가 튀어나오다 못해 아예 터널이 되어버렸네>

  오흐리드의 숙소는 대부분 아파트의 방을 빌려주는 형태이다. 하긴, 현지인들도 즐겨찾는 휴양지라니까 호스텔보다는 가족단위로 쉴 수 있는 아파트가 유리하겠지.

  대신 방은 가격이 비싸다. 가격담합이라도 한건가? 게다가 절반 이상은 영업을 쉬고 있어서 선택여지도 별로 없다. 이런 방식으로 비수기 가격대를 유지하는가 보다.

<좁은 골목길. 숙소를 찾아서>

  그때 지나가던 한 사람이 자전거를 보고 와서는, 무엇을 도와줄까 묻는다. 저렴한 호스텔을 찾는다고 하니 Di Angolo라는 곳에 데려다주었다. 호스텔은 의외로 근처에 있었는데 간판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

  가격은 10유로. 기대보다는 비싸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접근성 좋은 위치와 전경은 마음에 드니 다행이다.(주행거리 4.32km, 누적거리 8,261km)

<갈매기 까지. 바다라고 해도 믿을법한 오흐리드 항>

  온수로 샤워도 하고, 빨랫감이 한가득이다. 빨래를 끝내고는 자전거를 타고 시가지로 나섰다.

  우선 자전거가게부터 찾아본다. 그런데 도무지 랙을 구할 수 없다. 다시 Bojan에게 SOS를 청한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절망적이다. 마케도니아 어디에서도 프론트 랙을 구입할 수 없을 거라는 것. 용접을 하던 볼트로 고정하던 고칠 생각을 하라고 한다.

  또, 말도 안통하고 낯선 곳에서 공업사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호스텔 직원 역시 그런 정보는 모른다. 시내 외곽까지 공업사를 찾아 다니다가 문득 첫날 본 조선소가 떠올랐다. '아, 왜 이생각을 못했지? 조선소에서는 용접이 가능할거야'

  지체없이 조선소로 향한다. 그런데 도무지 영어가 통하지 않고, 간신히 뜻이 통한건 내일 오전에 다시 오라는 것. 어쩔 수 있나.

<숙소 근처의 작은 스케이트장><스케이트에 서툰 아이들은 물개(?)를 잡고 다닌다>

  다음날 다시 조선소를 찾았다. 내일 오라는 이유가 있었다. 함께 작업을 하던 청년이 있었는데 주인의 아들로 영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상황을 설명하니 이리저리 랙을 살펴보더니, 알루미늄 용접은 불가능하다는 것.

  맥이 풀려 돌아가려는데 청년에게 뭐라고 하더니 그를 따라가라고 한다. 그 역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향한 곳은 다른 엔지니어의 집. 그곳에서도 알루미늄 용접은 불가능하다면서 또 다른 집을 알려준다.

  이번에도 공업사가 아닌 주택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인상좋아 보이는 주인이 내려왔다. 뭐라고 마케도니아어가 이어지더니 랙을 보여달라고 한다.

  아, 이번에는 제대로 찾았다. 세르비아에서처럼 집에 딸린 창고에 작업실이 있었다. 용접기를 켜고 꼼꼼하게 작업을 해 주었다. 한참이 지나자 좌 우 부러진 부위는 감쪽같이 붙어있었다.

<드디어 용접 성공>

  가장 중요한 작업비. 재료비는 프리, 공임도 프리. 선물이라고 한다. 고맙고 미안해서 몇백 디나르를 줘도 사양한다. 고맙다는 말만 하고 청년과 함께 조선소로 돌아왔다.

  조선소에서는 정비한 랙을 보더니, 랙을 보강할 수 있도록 남는 철판을 끊어 볼트구멍까지 뚫어주었다. 잘 살펴보니 사실 큰 힘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고마웠다.

  정비소도 공장이 아니라 자택 창고에서 작업하기에 관련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구조인데. 아마 이 부자(父子)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용접이 가능했을까?

  역시 조선소 부자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 주위 가게로 가서 음료 두 캔을 사서 건넸다. 다행히 음료를 받아주어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큰 도움을 준 조선소. 감사합니다.>

  터키에서 앞 페니어(자전거 거치용 가방)를 달고부터는 더 이상 스포크 파손이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페니어를 지탱하는 랙이 너무 약한 것이다.

  랙은 두차례 부러졌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아예 랙을 사용할 수 없는 정도라서 페니어를 허리에 묶고 다녀야 했고, 마케도니아에서는 덜렁거리기는 했으나 그나마 조심조심 다닐 수는 있을 정도였다. 튼튼한 다른 랙으로 바꾸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런 보트를 만드는 조선소였구나>

  정말 다행인건 두번 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무사히 정비할 수 있었다. 당장 한국에서도 낯선 도시에서 알루미늄 용접소를 찾아보라고 하면 쉽지 않을텐데. 생각해 보면 기가막히게 운이 좋은거다.

<호숫가 작은 보트 선착장>

  게다가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에게 조건없이 도움을 준 적이 있었나?

<해 저무는 오흐리드>

  랙이 부러진 덕에 만난, 하지만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고마운 분들. 되갚을 수 없는 친절은 오히려 더 큰 빚이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이들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길에서 만난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받은, 앞으로 두고 두고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다.

<알렉산더? 알렉사난자호?>

  방파제에 앉아 아름다운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그동안 만났던 호수보다 더 마음이 아름답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사이 오흐리드의 밤이 깊어갔다.

<밤바다를 보는 듯한 오흐리드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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