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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23. 마르코와의 만남과 화해

  다음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비는 며칠간 이어졌다. 맑았던 하루를 이용해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 다녀온 외에는 꼼짝없이 마르코의 집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인적없는 외딴 곳. 컨테이너로 만든 듯한 그의 집과 사무실 벽은 티토(Tito), 체 게바라 등의 사진과 구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의 각종 포스터, 그림액자로 가득하다. 찬장 속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한 장 숨겨져 있었다. 켜진 불은 식탁 위 작은 전구 하나 뿐이다. TV는 없고, 작은 라디오 한대를 틀어놓고 있다.

  양동이를 받혀 놓은 재래식 화장실은 용변 후 톱밥으로 덮게 되어있다.

<마르코의 집, 멀리부터 표지판을 설치해 놓았다>

  더 놀라운건 이 집은 4개월동안 직접 지은 것이었고, 뒷동산에는 진입로를 내고 캠핑장과 골프연습시설, 휴양시설을 설치해 놓았다. 어이없게도 그가 말하던 미쿨리치(Mikulići) 자연공원은 이 뒷동산이었다. '그러니까 구글 맵에도 표시되지 않았지…….'

  집에는 통신선로와 수도 설비는 갖추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다. 온수는 고사하고 심지어 전기조차 인입되지 않는다. 대부분 자급자족 하며 전기 역시 태양열 패널을 설치해 직접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전력이 충분치 않아서 PC 사용시에는 디젤 발전기를 돌려야 한다. PC 사용 목적은 카우치서핑(Couch Surfing)과 웜샤워(Warm Showers) 요청에 응답하는 정도다.

<자가발전용 태양열 패널>

  집주인 마르코는 매우 특이한 친구였다.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서 강아지 한마리와 함께 은둔하듯 살고 있었다. 그 외 가족도 이웃도 없다. 원래 큰 개가 있었으나 늑대가 물어갔다고 한다.

  허름한 복장. 주름진 얼굴에 흰 머리를 길러 뒤로 묶었으나 머리숱이 적다. 하지만 큰 키와 위압감이 들 정도로 당당한 체구, 우렁찬 목소리에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음. 한 60~70정도 되었으려나?

  대부분 웜샤워 호스트는 자전거 여행을 경험 또는 계획하고 있거나, 최소한의 관심은 갖고 있는데 그는 자전거에 전혀 흥미가 없어보인다. 나이도 많은데다가 공감대(자전거)도 없고, 무뚝뚝하게 느껴져서 여러모로 불편했다.

  알고보니 그의 나이는 82세. 팔순 노인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고 화이트와인을 물처럼 마신다.

  그 연세에 그렇게 와인을 많이 마셔도 괜찮냐고 물어보니 대답이 걸작이다. 원래 레드와인을 마셨는데 건강이 안좋아져서 의사가 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레드와인 대신 화이트와인으로 바꿨다는 것. 의사가 담배 이야기는 안했나보다. 그의 흡연양을 보면 원래 시가를 피우다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크로아티아 첫번째 호스트 마르코. 언제나 손에는 담배가>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산다. 해뜰때 기상하고 해지면 잠자리에 든다. 낮에는 텃밭을 가꾸거나 집 수리를 하고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는다. 게스트들과의 만남도 좋은 소일거리다.

  식사 후에는 마지막 남은 빵으로 접시를 닦아서 먹는다. 기름기가 빵에 흡수되어 설거지도 편하고 물도 절약된다. 스님들이 단무지로 그릇을 닦는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생활모습은 스님이나 수도사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수도사를 떠올렸지만 사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나중에 메주고리예(Međugorje) 같은 가톨릭 성지에 가게 되면 절대 돈을 쓰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곳에 성모는 없으며 만들어진 이야기와 상인들만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마르코라는 이름은 가톨릭 세례명이다. 부모님에 의해서 어릴때 세례를 받았으며, 무신론자이지만 부모님의 신앙을 존중해서 세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마르코의 뒷동산. 미쿨리치 자연공원 캠핑장>

  그가 마을에 나가는건 한 달에 한 번 정도. 와인과 식량, 담배가 떨어질 때 뿐이다.

  이런 생활이 불편하지 않은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물어보니 대답은 어처구니없다. 돈이 없다는것 뿐. 전기도 물도 기름도 모든게 비싸다고 한다.

  사실 내가 기대한 답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 무소유의 철학 이런 거창한 무언가였는데 고작 돈이 없어서라고?

  "지금 크로아티아(Croatia)는 어디서나 돈을 요구한다. 만일 네가 두보르브니크에서 묵으면 최소 1박에 200쿠나(약 40,000원)는 요구할 것이다. 나는 돈이 없지만 여기 내 집에서 머무는 한 모든게 무료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돈 이야기를 자꾸 해서 듣기 불편할 정도다. 그럴거면 차라리 숙박비를 달라고 하던가.

<그림같은 마르코의 집 앞 풍경. 돈 없어서 여기 산다고?>

  비도 내리고 심심하던 차에 마르코의 차로 마을에 나가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에 당첨! 외톨이인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마을사람 모두와 친했다. 누구나 마르코와 나를 보며 반가워한다. 크로아티아어를 이해할 수 없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와, 마르코! 드디어 내려왔구나. 그동안 잘 지냈어? 이번 손님은 누구야?"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볼 때 손님과 함께 내려오는게 익숙한 듯 하다. 그들은 마치 오래 알던 친구처럼 대해주었고, 까페에 들리면 누군가가 내 것 까지 음료를 계산해주었다.

  마트 뿐만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을 돌면서 인사를 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집에 돌아왔다.

  '아니, 이런 활발한 사람이 대체 왜 산속에 갖혀 사는거지? 정말 돈이 없어서인가? 그나저나 뭐라도 사줘야 할텐데….'

  대접만 받은게 미안해서 빵을 조금 샀다. 사실 자꾸 돈이 없다는게 나에게 무언가 사라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그런데 음식은 충분하다면서 받지 않는다. 궁리끝에 5리터 짜리 화이트 와인 한 통을 사니 안색이 환해진다.

  아무튼 여러가지로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마을로>

  벽에 티토의 사진이 걸려있는것도 이상했다. 내가 듣기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티토를 매우 싫어하고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하기위해 전쟁까지 했는다는데?

  그걸 물어보자 정색하며 '네가 크로아티아 사람을 얼마나 만났길래 그렇게 단정지어 말하냐?'고 한다. 그는 티토와 오랜 친구였고, 구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단지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진심으로 구 체제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확실히 내가 틀렸다. 수박 겉핥기식의 짧은 지식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고, 내 경험에 의해 타인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속칭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크로아티아에도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나보다.

  그는 두브로브니크에서 태어났고 세르비아(Serbia)와 전혀 관계없지만, 내가 느끼기에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인식은 세르비아 사람의 의견에 더 가까웠다.

<지폐에 그려진 마르코의 고향 두브로브니크>

  또 모택동과 중국에 아주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 또한 발칸반도에서 쉽게 접하지 못한 의견이다. 내 체험상 키나(중국인)로 인식될 때 보다 꼬레(한국인)나 야빤(일본인)으로 보일 때 훨씬 우호적으로 느꼈고, 중국계 이민자들이 마을을 잠식하는것을 우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과 의견뿐만 아니라 살아온 궤적 역시 역시 특이했다. 2차 세계대전때 8살이었다면서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선원생활을 했고 해기사 면허를 갖고 있다. 그의 보트는 전쟁중에 침몰했다고 한다. 영어를 매우 잘하는데 알고보니 캐나다에서 오래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특이한건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와 친구이며 체 게바라의 경제자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 몇장의 사진과 그의 해박한 지식이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 그는 크로아티아는 돈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한다. 돈 이야기만 안하면 참 멋질텐데 종종 쪼잔하게 느껴 질 정도다.

<돈은 없어도 충분히 멋진 마르코의 창고>

  "돈 없는 생활이 힘든건 어느 나라나 당연한 것 아닌가?"

  물어보자 그가 나는 사회에 대해 모르는게 많다면서 공부를 더 하라고 한다.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을 꼭 읽으라고 했을때, 비로소 그의 시각이나 행동이 특이한 이유를 알아챘다.

  그는 바로 공산주의자였다. 그것도 내 눈에 비친 그는 골수 공산주의자다.

  혹시 너 공산주의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니라고 했다. 공산주의자(Communist)가 아닌 사회주의자(Socialist)란다. 사회과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공산주의의 완만한 형태가 사회주의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뿐 그 차이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건 머리에 뿔은 없다는 것 뿐.

  예전 한국에서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묘사되었다고 하니 배를 잡고 웃는다.

  그렇다. 그의 모든 생각과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체제를 그리워하는건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고, 중국을 좋아하는건 공산주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우치 서핑이나 웜샤워로 공간을 개방하는 이유 역시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한 수단일 뿐이었다. 철의 장막과 유고슬라비아는 무너졌지만, 그는 자신의 공간에 새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를 만든 것이었다.

<함께 마르코의 집에 묵었던 호주 자전거 여행자 Jack과 Hannah>

  그의 집에는 신문도 들어오지 않고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듯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막힘이 없다. 심지어 내가 두브로브니크에 다녀오자 그날, 한국에서 지하철(2호선) 사고가 났다고 알려줬다.(그날은 특별히 디젤 발전기를 돌려줘서 집에 연락할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임에도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남침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3대 세습도 비판적이다. 놀라운 일이다. 그 정보는 다 라디오에서 들은걸까? 아니면 다른 한국인이 많이 다녀간 걸까?

  알고보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당시, 이념을 넘어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명확히 인식했으며, 소련과 많은 부분 대립하면서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한국에 대한 시각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어느정도 친해진 후에는 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과 일침이 이어졌다.

  "넌 누구냐(Who are you)?"

  간단하지만 의외로 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내가 누구든지 환영. 스스로 고립되었으나 사실 그는 활발한 친구였다>

  이름과 함께 한국인이라고 말했더니 한국은 사라졌고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소리야?"

  "한국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냈지만 한국만의 무언가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실체가 없는, 껍데기만 동양인이지 미국과 차이가 없다. 대체 한국의 정체성이 뭔가?

  철학이 없고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인들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 채 하루종일 기계처럼 일만 한다.

  게다가 사고방식은 획일적이고 개성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인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자랑거리가 사라졌기에 한국인은 엉뚱한데서 자부심을 찾는다.

  일례로 크로아티아에서도 유명한 싸이. 그의 음악은 미국식이며 가사 역시 별 내용도 없다. 그는 동양계 미국 팝가수로 보일 뿐이다. 그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려면 그게 자랑스럽냐? 그런건 한국의 자랑이 될 수 없다."

  과거 선원경력이 있던 그는 세월호 사건도 알고 있었으며, 여러 문제점을 제기한다. 이런 한국의 현실은 철학이 없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돈만을 위해 달린 결과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반박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의 말은 대부분 일리가 있었고 오해도 있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대체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매우 기분이 상했다. 외국인의 입을 통해 한국의 문제점을 듣게 되니 맞는 말이라도 감정적으로 쓰라리다.

<머나먼 한국이 갈 길은?>

  그러면서 그는 지금의 한국에는 미래가 없으니 좁은 한국에서 아둥바둥 살지 말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라고 한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며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세월호 사고 이후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가 있으면 바꿔야지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 역시 제 3국으로 떠난게 아니라 돌아와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피하지 않을 것이다."

  이 대답에는 흡족한 듯 보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콩글리시의 향연이 이어졌다.

<마르코의 집 앞 샛길. 여기로 도망?>

  "모든 한국인이 피동적으로 사는 건 아니다. 나 역시 편안한 생활이 좋지만 세계를 배우기 위한 여정 중이다. 또한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도전하고 세계 각국에서 노력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근로시간이 매우 길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나도 일할때는 7시 이전에 출근하여 24시 이후에 퇴근하기 예사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과 열정때문에 전쟁 이후 이후 폐허만 남았던 한국은 가장 빠른 시간에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러기 위해 중동에서 땀을 흘렸고, 정글에서 피를 흘렸다. 그 희생의 바탕에는 당신이 보기에 어이없어 보이는, 싸이를 자랑스러워 할 정도의 애국심이 있었다.

  한국인이 영혼없이 일만 한다고? 그 전에 한국보다 잘 살았던 나라는? 그 잘난 철학과 삶의 여유를 누리면서 온전히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가? 자원도 기반 시설도 없고,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이 발전할때 그들은 뭘 했나?"

<공산당의 뿔처럼 뾰족한 나무는 사이프러스 나무라고 한다>

  "당신 역시 한국의 일부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라.

  철학이 없는 한국은 가장 짧은 시간에 민주주의까지 성숙시켰다. 과거에는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난한 나라를 돕고 있다. 한국전쟁때 UN군의 도움을 받았던 한국군은 지금 아이티,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국에 몇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건 아직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 한국인이다.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지금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에 돌아가서도 내 꿈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 임무와 책임을 다 할 것이다. 설령 전쟁이 나고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르지만 그자들은 틀렸다. 그건 현대 세계가 증명한다. 오히려 당신이 과거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늘 돈 없다는 말만 외치는 당신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만약 국어로 번역된 마르크스 책이 합법이라면 읽어 보겠다. 하지만 내가 그걸 읽으면 마르크스의 모순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것이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희망을 향해>

  서로 상대의 민감한 부분을 많이 건드렸다. 그 과정에서 집 주인인 마르코가 분노한다면 당장 나가리라 생각도 했다. 까짓거, 하루 잘 데 없으랴?

  말싸움이나 다름 없었지만 멋진 토의였고 이후 어딘가 더 친해진 느낌이다. 물론 그가 평생 지켜왔던 신념을 버릴 리 없다. 하지만 마르코의 집에서 아무 문제없이 비가 그칠때 까지 며칠 더 머물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아드리아해의 석양>

  그리고, 마침내 마르코의 집을 떠나는 날.

  짐을 꾸리고 작별 인사를 하러 방에 들어갔는데 마르코는 라디오를 들으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아. 눈물은 전혀 흘리지 않았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당황스럽다. '역경을 거치며 살아온 공산주의자가 울다니?'

  이유는 라디오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극을 듣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나 있던 과거의 이야기라고 위로했으나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넌 쉽게 말하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은 일본군에 피해를 입었지만, 이건 크로아티아인에 의해 크로아티아인이 죽은 이야기다."

  또 이 과정에 그의 가족도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 그도 공산주의자 이전에 인간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는 아니었다.

  "내가 이해 못한다고? 한국도 마찬가지다. 너도 알듯이 한국전쟁때 북한이 같은 민족인 남한을 공격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군인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은 민간인을 수없이 학살했다.

  통일 직전에 중공은 100만 대군을 투입하여 한국의 통일을 가로막았고, 그 결과 지금도 남북은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아하는 공산주의자와 중공을 싫어하는거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남북은 언젠가 통일될거고, 사회는 약자에게도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자기 나라와 위치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자."

  마지막 인사와 악수를 하고 서로 힘껏 부둥켜안았다. 백마디 말보다 마지막 허그로 그와 진심으로 소통한 기분이었다.

<안녕 마르코. 그동안 고마웠어>

  많은 숙제를 던져준 마르코와의 만남.

  공산주의자인 마르코와 자유민주주의자인 내가 우정을 나누었듯이, 남북이 사상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눌 날은 언제 찾아올까?

  생전에 다시 마르코를 만나기 어렵겠지?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당면한 현실을 극복해 낸,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행복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보란듯이 그 앞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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