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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32. 비소코의 피라미드 소동

  다른 여행자와 소식을 주고받다가 사라예보(Sarajevo) 북동쪽 약 30km에 위치한 비소코(Visoko)라는 곳에 피라미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집트나 마야 피라미드는 들어봤지만, BiH의 피라미드는 금시초문이다. 사라예보 투어까지 했음에도 왜 나는 이걸 몰랐을까? 혹시 짧은 영어때문에 놓쳤나?

  부랴부랴 인터넷을 찾아 봤다. 그런데 한글 웹에서는 초고대 문명이나,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둥 믿기 어려운 자료 뿐이었다. 발견자는 사업가였다가 학자였다가 박사이기도 하고, 위치조차 사라예보 북동 혹은 북서쪽으로 오락가락한다. 잘못된 정보의 시작은 모 신문사로 보이는데, 그 기사를 근거로 여러 곳에서 오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정작 정보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론니 플래닛에 비소코의 정보가 나와 있는 것. Semir Osmanagić라는 고고학자가 피라미드군을 발견했다고 한다. 공식 웹 사이트에는 발굴 관련하여 자원봉사 캠프도 운영하고, 비용 후원도 받는 모양이다.

<비소코 피라미드 공식 웹 사이트>

  대충 확인한 바로는 5기의 피라미드와 지하 미궁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유럽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피라미드이다. 12,000년 전이라. 4대문명이나 고조선 건국의 두배가 넘는 데? 반신반의.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비소코에 가려면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그다지 멀지 않으니 자전거로 다녀오기로 했다.

  비소코를 향해 달리는 길 오랜만에 날씨가 좋으니 기분도 덩달아 좋다. 경치 역시 좋아서 달리기에 더 없이 쾌적하다.

<올림픽 공원을 지나며>

  얼마나 지났을까? 도로 공사중인 구간이 나타났다.

  비포장 도로야 자주 보아왔지만, 도로 통제 시스템이 재미있다. 보통 왕복 2차선 도로를 막을 경우에 양 쪽에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여기는 이동식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동 신호등>

  신호를 받아 공사구간을 통과하고 뒤를 돌아보니 똑같은 신호등이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신호등에 안테나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두 신호등을 동기화 시켰을까?

  아마 내장된 시계를 이용한 방식인듯 하다.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만일 시 동기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교통신호가 뒤죽박죽이 된다. 사고의 위험도 있다. 뭐, 안전하니까 사용하겠지?

<반대쪽도 파란불>

  비소코 근처에 이르니 주위 풍경이 독특하다. 산의 반은 나무가 심어져 있고, 반은 잔디밭이다. 대머리산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고, 마치 학생주임 선생님이 머리 긴 학생 잡아서 바리깡으로 반만 민 것 처럼 보인다.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린 머리모양의 산>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 작은 강을 건너자 드디어 비소코에 도착했다.

  주위 언덕 모양은 얼추 피라미드처럼 생기긴 했다. 피라미드에 오랜 시간 토사가 쌓이고 나무가 자라면 언덕이 될 수 있나? 그리고 그 시간동안 완전히 잊혀졌다가 마침내 드러났다는것도 신기하다. 어떤 전설이라도 전해졌을텐데.

<저기가 피라미드구나>

  호기심을 안고 시내로 들어왔는데 안내판 하나 없다. 없으면 어떠랴. 언덕 방향으로 가다보면 나오겠지.

<피라미드로 보이는 언덕을 향해>

  그런데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도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는다. 주위 풍경은 그냥 시골 마을일 뿐 피라미드로 인한 관광지화와는 거리가 먼 듯 하다. 멀리 보이는 산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침 동네 주민이 나와있길래 피라미드를 물어봤더니 심드렁한 태도로 그냥 쭉 가라고 한다.

<주위는 그저 시골 마을>

  길은 어느새 비포장도로로 바뀌었고 경사가 가파르다.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이 산이 아니었나? 거리가 제법 먼데 자전거를 타고 가기 힘든 도로 상태다. 게다가 혹시 비가 올까봐 슬리퍼를 신고 왔다. 등산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물이라도 챙겨 올 걸 그랬다.

<저건 뒷동산인가 피라미드인가?>

  한참 산을 타니 작은 숙소 겸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콜라 한 잔 시켜놓고 잠시 쉰다. 가격은 시내의 두배 정도인 듯. 비소코 피라미드로 득보는 사람은 이 가게 주인밖에 없는 듯 하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샛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피라미드 앞 레스토랑><거의 다 왔다. 마지막 언덕>

  언덕을 오르는데 이건, 뭐 피라미드라기보다 그저 동네 산이다. 하긴 이런 모습이니까 그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겠지. 두어 번 미끄러지면서 간신히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을 향한 샛길>

  정상에는 Stari Grad가 폐허로 남아 있었다. 13세기 이전에 세워졌다는데 구 시가라기에 너무 작다. 피라미드에 대한 안내따위는 없었다.

<13세기 Stari Grad>

  그저 비소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전망대일 뿐이었다. 왜 이런 역사 자원을 이렇게 방치하는거지?

  마침 동네 주민들이 산에 올라왔길래 피라미드를 물어보니 현 위치는 태양, 앞에 보이는 언덕은 달의 피라미드, 주위 언덕도 피라미드라고 한다.

<앞에 보이는게 달의 피라미드>

  사실 경치도 좋고 포근한 마을이었지만 허탈함만 가득하다. 차라리 경치 좋은 곳에 등산한다는 생각으로 왔다면 이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하긴 그랬으면 운동화를 신고왔겠지. 다시 몇차례 미끄러지며 터벅터벅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마침 한 커플이 나타났다. 슬로바키아 출신 로만과 실비아. 이들은 여기에 묵고 있다고 한다.

<슬로바키아 여행자 로만과 실비아>

  그러고 보니 피라미드라는 목표만 없었다면 하루 쉬다가기에도 좋은 곳이다. 단 오는 길이 많이 험한게 단점이지만, 내가 올라온 반대편은 포장이 되어 있는 내리막이라고 한다.

<주위 풍경은 산인가 피라미드인가?>

  피라미드 반대편에는 뭔가 있겠지. 드디어 진짜 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중턱에서 길을 오르는 친구를 만났다. 나와 같은 회사의 자전거네. 하지만 그는 급경사로 인해 더 이상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끌어야만 했다. 반면 내 길은 수월하다.

<자전거를 끌며 힘겨운 발걸음>

  오. 드디어 피라미드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진작 여기로 왔어야 하는건데. 괜히 엉뚱한데서 헤맸구나.

  앞에는 현장 사무소로 보이는 건물도 있다. 가까이 가 보니 문은 닫혀있었다. 벌써 운영 시간이 지났나?

<드디어 피라미드?>

  기대에 차서 발굴 현장으로 향하는데 현장은 허술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원한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거대한 피라미드와 발굴본부. 차단선 안에 갓처럼 챙이 넓은 작업모를 쓴 학자들이 돋보기를 들고 땅을 바라보는 모습.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황량한 돌무더기 뿐이다.

<흙에 덮힌 이 돌이 고대 콘크리트라고?>

  안내판에는 이곳, 태양의 피라미드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설명하고 있었다.

  220미터의 이 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크며, 북쪽을 가리키는 오차는 단 0˚ 0' 12"라고 한다.(이집트 피라미드는 0˚ 2' 차이) 경사도는 45도. 하긴, 오를 때 무척 가파르기는 했다. 여름날 일몰시에는 태양 피라미드의 그림자가 비소코 계곡을 지나다가 달의 피라미드를 완전히 덮는데 천체의 운행을 묘사한 것이다.

  피라미드 재질은 고대의 콘크리트라는데 무지한 내 눈에는 그저 돌더미일 뿐이다. 피라미드 정상에서는 지름 4.5m에 달하는 범위에서 7.83Hz, 28kHz의 초음파 빔이 측정되었다고 한다.

<피라미드 소개자료>

  그런데 지도를 따라 발굴 현장을 더 거슬러 올라가 봐도 의미없는 돌더미만 가득하다.

  '뭐야 겨우 이거였어?'

  발굴은 중단된듯 보였다. 대체 이렇게 대단한 곳이 왜 이 모양으로 방치되어 있는 걸까? 정말 무슨 음모론처럼 FBI에서 초고대문명이 알려지는것을 막기 위해 공작이라도 한 건가?

  마지막으로 나침반을 이용, 방위를 확인했는데 그 정밀하다는 비소코 피라미드의 편차는 제법 크다. 물론 이 지역의 도자각이나 도편각을 알지 못하지만, 좀 이상한다. 완전히 발굴되면 다르려나?

<등고선으로 본 피라미드. 점선이 등산로. 실선이 포장로.>

  더 이상 흥미도 없고 날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결국 사라예보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주행거리 69.62km, 누적거리 9,299km)

<사라예보로 복귀>

  내 눈으로 피라미드를 보고 왔지만, 개운치 못해 인터넷을 다시 확인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2014년 국제 자원 봉사자 여름 캠프의 배너가 걸려 있었다. 클릭해 보니 더 자세한 정보는 2014년 12월 15일 이후에 공지한다고 한다. '여름' 캠프다.

<여름 캠프는 겨울에 공지?>

  위키피디아에서 Bosnian Pyramid를 찾아 보니 Bosnian Pyramid Claims로 연결된다.

  요약하자면 고고학자들은 이곳이 자연 지형이며, 유적은 조작되었다고 결론지었고, BiH 정부는 Semir Osmanagić의 발굴 허가를 취소했다.

<중단된 듯 한 발굴 현장>

  위키피디아 정보를 100% 신뢰할 수는 없다. 관련 근거가 링크되어 있었지만, 영어 기사나 논문을 계속 읽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나로서는 피라미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

  확실한 건 내가 본 언덕은 특이하긴 했지만 피라미드처럼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 학자들도 거짓으로 인정한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12,000년 전은 아니라도, Visoki 언덕이 정말 태양의 피라미드일 수도 있으며, 지금 고고학자들의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다. 슐레이만도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몽상가일 뿐이었으니까. 어쩌면 밝혀지면 안되는 모종의 이유로 덮었는지도 모른다.

<비소코의 모스크>

  이제 더 이상 피라미드에는 관심이 없다. 이 헤프닝이 나에게 흥미를 끄는 부분은 전혀 다른 두가지다.

  하나는 확실하지 않은 해외 토픽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위치까지 틀릴 정도로) 보도하고서, 새 소식은 언급하지 않은 한국 언론의 무책임함이다. 덕분에 아직도 한국에서는 비소코 피라미드가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뭐, 좋게 넘어가자면 우리와 직접적인 영향이 없으므로 취재하지 않았다고 치자.

<사건의 현장. 사라예보 북동쪽 30km 비소코 마을>

  두번째는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BiH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일이다.

  Semir Osmanagić이 조작했다는 전제 하에, 어쩌면 개인의 영광을 위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Semir Osmanagić는 보스니아계라고 한다. 어쩌면 BiH가 과거 유럽 최초의 발달된 문명을 가졌음을 홍보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까?

<비소코 근처의 작은 마을>

  정치적 목적에 따른 역사 왜곡과 (특히 고구려 관련) 연구 제한은 중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에서도 일부 종교 집단은 검증되지 않은 한국사를 주장하기도 한다.

  어쩌면 Semir Osmanagić의 의도가 과거의 발달된 문명과 영화를 제시하면서 지금의 BiH에 자부심을 갖게 하고 나라를 결집시키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또다른 피라미드. 사라예보의 야경>

  이제 관심과 호감을 갖게 된 BiH. 역사가 긴 것이 자랑만은 아니며 짧다고 열등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BiH가 거울삼아야 할 역사는 고대사가 아니라 근대사다. 고대 왕의 무덤 피라미드가 아닌, 산중턱에 널린 현대 시민들의 무덤이다.

  비소코 피라미드의 소동을 보며, BiH가 허황된 전설과 반칙 대신 솔직한 태도로 과거를 되짚어 나가면서 민족 대립의 아픔을 극복하고 화해와 관용을 이끌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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