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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38. 동유럽 무사수행(武士修行) - 미래의 크로캅을 만나다

  성모님의 도시 메주고리예(Međugorje)를 뒤로 하고 달리는 길.

<계속되는 고갯길>

  길은 예상대로 오르락 내리락의 연속이다. 그동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iH; Bosnia i Hercegovina)의 산을 줄곧 봐 오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쉽게 보내주지 않는구나.

  인구가 많지 않은데다, 국경 지대여서 그런지 공터가 많다. 계속해서 도로를 보수하거나 공터를 측량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뢰는 대부분 제거되었기에 이런 활동이 가능하겠지?

<도로 옆 공터>

  한동안 측량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차 한대가 급정지한다. 운전자는 Ivan Rašić이라면서 인사를 건넨다. 여행경로에 대해 물어보더니, 본인도 자전거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그러고는 근처 Ljubuški라는 곳에 산다면서 하룻 밤 묵어 갈 것을 권유한다.

  음, 그러면 예정보다 늦어지고, 이미 BiH 마르크도 없는데? 그러자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에 결국 하루 신세지기로 했다. 

<작업중인 측량기사>

  이반이 앞에서 호송하듯이 천천히 차를 몰아 주어 따라가기 편했다. 금세 멋진 집이 나왔고, 빈 방을 내어줘서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반이 제공한 편안한 방>

  그 역시 자전거 여행을 해 와서인지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샤워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려 주었고 곧 식사를 권한다. 그는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스웨덴 등지에서 일하다 귀국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운동시간이 되었다. 같이 가서 구경해도 되고, 피곤하면 집에서 쉬라고 한다. 무슨 운동인지 물어보니 주짓수(Jiu-jitsu)를 수련한다는 것.

  나도 유도를 했었다고 하니 매우 기뻐하며 함께 가자고 잡아끈다.

  비포장 골목길을 한참 돌아가자 체육관이 나왔다. 남는 도복을 빌려줬는데 나한테 맞춘 것처럼 잘 맞는다.

<도복을 둘러메고>

  유도기술을 알려주기도 하고 나도 몇가지 조르기 기술을 배운 후, 체급이 비슷한 Ivan Skoko라는 친구와 맞잡았다. 처음에 파란띠인것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기술도 좋고 악력이 어찌나 강한지 한번 걸리면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Tip. 주짓수 파란띠는 다른 운동의 유단자 수준이며, 검은띠는 10년 정도로 본다고 합니다.)

  주짓수는 유술의 일종으로 굳히기 위주로 발전한 운동이며, 언젠가 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닿은것이다. 직접 해보니 매우 재미있는 운동이었으며, 메치기의 비중이 적어서 무릎이나 허리에 부담도 덜 해 보였다. 거친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나이 들어서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운동이 아닐까 싶다. 

<운동 종료 후 다 함께 한 컷>

  반면 굳히기에 특화된 만큼 운동량은 어마어마하다. 실전성이 강하여 유도의 누르기 자세는 별 의미없고, 유도에서 반칙인 도복이나 띠를 이용한 조르기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공격시간과 무관하게 항복을 받아내야 종료되는 만큼 더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며 상대를 확실히 제압해야 하는 면도 있었다.

  이 체육관의 사범은 자색띠를 보유한 Josip Artuković로 7년가량 수련했으며 격투기 대회에도 많이 출전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크로캅과 함께 운동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초크(Choke)는 도무지 풀 수 없었다. 

<주짓수 사범 Josip Artuković과 함께>

  BiH를 떠나려다 뜻하지 않게 주짓수를 체험한건 정말 행운이었다. 새로운 재미있는 운동을 알게되어 정말 좋았다.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는 스포츠 강국이었고, 사람들의 신체조건이 좋아서 운동에 유리하다고 한다. 특히 인기있는 종목은 축구, 배구, 수구 등이었는데 최근에는 이종격투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이종격투기 붐의 중심에는 미르코 크로캅(Mirko Cro Cop)이라는 사나이가 있다. 크로캅이라는 이름처럼 전직 크로아티아(Croatia) 경찰로서, 종합격투기(MMA)에 뛰어들었다.

  막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크로아티아 국기가 그려진 운동복을 입고 세계의 강호들을 물리치는 그는 삽시간에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브라질의 펠레처럼, 스포츠의 활약으로 정계에 까지 진출했고 현재 수많은 크로아티아와 BiH 청년들의 롤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크로캅의 경기 모습. http://www.ufc.com의 자료 링크입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산업기반이 거의 없는 BiH. 그 열악한 환경을 딛고 꿈을 이루기 위해 땀방울을 흘리는 정직한 청년들.

  좋은 시설도 없고, 마땅한 스폰서도 없지만 맨주먹으로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그들과의 만남은 정말 특별했고, 역시 프로레슬링, 복싱 등이 인기였던 우리나라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운동 후에는 또 다른 친구들의 집에 초대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젊은 우스타샤(Ustaša)라면서 환영해 줬다.

  우스타샤는 2차대전 중 활동한 크로아티아계 극우 세력으로 세르비아에서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우스타샤라는 말에 처음에는 긴장했으나 장난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이반과 우스타샤 친구들은 여름 모로코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중이었다. 서로 경험담을 나누기도 하고 자전거 정비를 돕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더했다.(5월 26일 주행거리 27.07km / 누적거리 9,471km)

  다음 날, 이반은 꼭 가야할 곳이 있다고 한다. 차로 15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Kravice라는 폭포였다. 낙차가 크지는 않지만, 7개나 되는 웅장한 폭포가 흘러내리는 멋진 곳이었다. 이반이 아니었다면 이런 멋진 곳이 있는줄도 몰랐을 것이다. 

<멋진 Kravice 폭포>

  폭포 구경 후, Ljubuški 시내를 한바퀴 돌며 곳곳을 소개해 줬다. 그리고 결국 다가온 아쉬운 작별의 시간. 마침, 세르비아에서 구입한 외투가 떠올랐다. 나한테는 크고, 이제 외투가 필요없는 날씨다. 이반에게 외투를 입혀보자 딱 맞는다. 짐 부피도 줄었고 더 어울리는 주인을 찾은것 같아 흐뭇하다.

<고마운 친구 Ivan Rašić과 함께>

  이반이 추천한 Crveni Grm 국경은 계획했던 Imoski 국경보다 가깝고 달리기도 좋을 것이라고 한다. 국경은 단 10km 정도 떨어져 있을 뿐이다. 

<잊지못할 추억을 남긴 Ljubuški 출발>

  Ljubuški 외곽 역시 BiH의 여느 도시들처럼 무덤이 가득하다. 다만, 이슬람(Islam)의 하얀 비석이 아닌, 십자가가 세워진 대리석 관은 역시 가톨릭(Catholic) 문명권이라는걸 새삼스레 느끼게 해준다. 

<가톨릭 양식 묘지>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오르자 이윽고 BiH-크로아티아 국경이 나타났다. 이제 그동안 정든 BiH와도 작별이구나. 

<저 국경을 지나면 다시 크로아티아>

  유도를 통한 성장 과정과 진정한 우정을 그린 명작, 신 학원라이벌전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하나다는 RWC 대회를 준비하며 동유럽의 어느 나라로 무사수행(武士修行)을 떠난다. 

<사라예보(Sarajevo)와는 달리 매우 푸른 Lubuški의 Trebižat 강>

  그곳은 오랜 전쟁으로 파괴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고수들이 즐비했지만 운동에 집중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하나다는 살기좋은 나라에서 태어나 운 좋게 큰 대회에 참가하게 된 애송이 정도로 취급을 받았지만, 결국 모두 마음을 열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헤르체고비나 와인의 길에서 Wing>

  BiH의 첫인상은 정확히 그런 나라였다. 총탄 자국이 수두룩한 파괴된 건물, 여기저기서 보이는 지뢰 경고판, 심지어 권총을 소지한 사람까지.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의 표정은 책과는 다르게 밝았다. 하나다가 겪은 초반의 냉대는 없었다. BiH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고, 가진게 적지만 아낌없이 베풀었다. 또한 나도 하나다처럼 함께 운동 하며 새로운 초크 기술까지 배우게 되었으니 책의 무대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크로아티아 국기가 그려진 담장>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 상황과 아직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 게다가 120년 만의 홍수로 힘들어하는 BiH.

  줄곧 대접받고 다니면서 이 나라를 더 알게 되고 이들의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었고, 헌혈에 현지인들과의 주짓수 수련이라는 특별한 경험까지 선사한 고마운 BiH.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기원하며 한 달간의 BiH 여행을 마무리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자전거 여행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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