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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6. 폭포 위 작은 마을 슬루니와 10,000km 주파

  잊지못할 플리트비체(Plitvička) 마라톤도 끝났고 호수 구경도 모두 마쳤다. 이제 이 물가비싼 플리트비체를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아직 무릎상태가 완전하지 않고, 캠핑장 체크아웃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최대한 출발을 늦추었다.

  꾸물거리다 보니 반나절이 지나서야 비로소 플리트비체에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럼 설렁설렁 출발해 볼까?

<멀리 내려다보이는 플리트비체 호수>

  마라톤을 하면서 달렸던 길을 Wing과 함께 다시 달린다. 뛰고 쉰 외에는 한 것도 없지만 3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오랜 전 일인것같다. 어쩌면 이 길과 이 순간도 언젠가 기억속에 묻혀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마라톤 코스를 돌아본다>

  아쉬워 할 새도 없이 해가 넘어간다. 이 길에는 마을도 드물다. Slunjčica 마을 진입 전 도로 곁에서 쉬기로 했다. 풀이 무성해서 진입이 쉽지 않았지만 엄폐는 잘 될 듯 하다. 킥스탠드가 부러져 서있지 못하는 Wing은 텐트 지주핀 대용이다.(6월 4일 주행거리 29.57km, 누적거리 9,976km)

<도로변에 텐트 알 아랍 전개>

  한적한 곳에서 푹 쉬었으니 이제 열심히 달려야겠다. 해지기 전에 크로아티아(Croatia)의 수도 자그레브(Zagreb)에 도착하는게 목표다.

<녹색이 이렇게 다양하다니><소박한 마을을 지나>

  그런데 도무지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자전거 펑크도 아니고 무릎 문제도 아니다. 지나가는 길마다 절경이기 때문이다. 멍하니 주변 광경을 바라보느라 시간가는줄 모른다.

<크로아티아의 체스판 문양이 새겨진 십자가탑><마을 행사장에서 음료 시음>

  특히 채 10km도 못가서 나타난 Slunj라는 마을은 플리트비체에 비하면 그다지 잘 알려진 것 같지 않지만 굉장한 곳이었다.

<수풀 사이로 보이는 백작 주거지>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Slunj의 첫 기록은 14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과 수풀사이에 가려진 성곽 잔해는 이 지역을 다스린 백작(Count)의 주거지였으며 절벽과 강으로 둘러싸인 덕분에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방어하는데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집도 재건해야 할듯>

  백작 영지와 강 건너편의 중세 마을은 16세기 말까지 존치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며 18세기에 재건되었고 이후 오스만 제국이 안정되면서 방어기지 역할대신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19세기 초에 다리가 놓인게 큰 몫을 했다.

<마을 광장에 열린 장터>

  Slunj 마을 자체도 정감있었지만 Slunjčica강을 건너 중세 마을이 있었다는 곳에 가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Rastoke라는 곳이다.

<강을 가로질러 Slunj-Rastoke를 잇는 다리>

  물가에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다. 집 정원이 개울인 셈이다. 집 앞에서 낚시도 하고 멱도 감을 수 있다. 겨울에는 아마 썰매도 탈 수 있을 것이다.

<개울가에 지어진 집>

  더 놀라운건 바로 폭포다. 강변에 작은 폭포가 흐르는건 플리트비체와 큰 차이가 없지만 폭포는 주택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폭포위의 집은 들어본 적도 없다.

<폭포 위의 집?>

  조금 이상한 생각이지만 수맥이 콸콸 흘러넘치는구나.

<집집마다 폭포수가 흘러넘친다>

  저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리를 되돌아 가야한다. 다리야 뭐 건너면 되지만 마을 곳곳을 걸어서 누빌 자신이 없어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다리 아래도 절경이다>

  그나마 마을 반대편 도로 아래까지는 가 보았지만 물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마을로 들어서면 입장료까지 받는다고 한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래도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좋은 곳이다. 때로는 현장에 직접 가 있는 것 보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게 좋을 때도 있다. 이곳도 그런 곳이기를 바라면서 마을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아니 배산누수(背山漏水)>

  마을 외곽에는 거대한 관광버스가 서 있었다. 아마 자그레브에서 플리트비체로 들어가는길에 쉬어가는 것인가보다. 놓칠 수 없는 풍경이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저 개울을 건너면 좋으련만>

  그러고 보니 관광객도 참 많다. 한국인은 물론 유럽에서도 왔고, 인도네시아 여행자들도 만났다. 그 중 인상적인 분이 계셨다. 한국 노부부였는데 자동차로 크로아티아를 여행중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고생한다면서 방울토마토 등 과일을 한웅큼 싸 주셨다. 성함조차 확인하지 못했는데……. 아아 감사합니다.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 후 잠시 휴식>

  주위 사람들에게 ‘슬렁즈 참 멋지다’라고 했는데 아무도 못알아듣는다. 알고보니 이곳 Slunj는슬렁즈가 아니라 슬루니였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그랬듯 이 동네는 j를 /이/로 발음한다고는 알고 있었는데 난 왜 자꾸 슬렁즈로 읽을까?

<슬렁즈가 아닌 슬루니>

  아쉽지만 슬렁즈, 아니 슬루니도 이제 떠나야 한다. 사실 뭔가를 할 만한 곳은 아니고 물가도 비싸보였다. 과일로 식사도 했고 쉴만큼 쉬었고 즐길만큼 즐겼기에 미련없이 떠난다.

  슬루니를 떠난지 얼마못되어 나타난 Lapovac라는 마을에서 감격스런 순간을 맞았다. 드디어 10,000km을 주파한 것이다. 지구둘레 1/4, 25%.

<드디어 10,000km이다>

  하긴 빠른 걸음은 아니다. 지난 1월에 출발해서 8월에 5,000km이었고 다시 올해 6월이니 18개월만에 10,000을 뛴 것이다. 단순 계산하면 하루에 17km정도. 느려도 정말 느린 행보다.

  또 자전거여행 베테랑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거리기는 하다. 자전거여행자들은 워낙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다보니 이제 막 걸음마 뗏다고 할수 있을까? 얼마전 만난 우주여행자만 해도 이미 내 4배 거리를 달렸으니.

<지구 1/4바퀴 기념>

  그래도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10,000km 기념촬영을 했다.

<자주포, 아니 자주(自走) 예초기><시원하게 쭉 뻗은 도로>

  그런데 기념촬영을 마치기 무섭게 그 좋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침 근처에 레스토랑이 하나있었다. 저기서 커피한잔 시켜놓고 비를 피해야겠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빗방울이 굵어지더니 세차게 쏟아진다. 이동네 폭우의 위력은 익히 알고 있기에 지금 이런 피난처가 나타난게 이 이상 다행일 수 없다.

  비는 세시간가량 이어졌으나 지루할 틈은 없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지난 생각 때문이다.

<분명히 비가 올 날씨는 아니었는데>

  병원 입원 후의 막막함. 열심히 뛰어 간신히 비행기를 탔던 인천공항.

  말레이시아에 내렸을때의 막막함. 인도의 문화충격과 각목을 들고다니며 여행하던 그때.

  네팔의 웅장한 설산과 타는듯한 아랍의 사막, 황량한 오만의 광야.

  지갑을 도난당한 터키, 민규형님과 달렸던 불가리아, 달마와 함께한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친절한 사람들, 타임머신을 탄 듯한 코소보의 시간.

  마케도니아에서 보낸 한겨울과 그 와중에 수영했던 마트카 계곡,

  알바니아의 끝없는 방공호, 더없이 아름다웠던 몬테네그로, 보스니아에서의 헌혈 등.

<폭우 속, 회상의 시간>

  하나하나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그리고 그 가운데 만난 고마운 사람들…….

  이곳은 10,000km을 맞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기에도 좋은 장소이며 그럴만한 분위기였다. 빗소리와 함께 즐거웠던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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