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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8. 자그레브와 넥타이의 유래

  자그레브(Zagreb)의 값싼 ‘군수 청소년회관(Logistic Youth Centre)’에서 몸 회복도 할겸 며칠 쉬어갈 계획이었다. 물론 쉬는것도 좋지만 자그레브 시내를 구경하는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침 숙소에 또다른 한국인 여행자가 들어왔다. 바로 배낭여행중인 김경남 군. 오랜만에 말벗이 생기니 참 좋다.

  나는 자전거로 경남군은 대중교통을 타고 자그레브 중앙 역으로 향했다.

<자그레브 역의 증기기관차><실제 운행하는 기관차>

  역 앞에는 잔디가 깔린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광장 전면에 있는 말 위에서 칼을 치켜든 동상의 주인공은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Kingdom of Croatia)을 설립한 토미슬라브(Tomislav) 왕이다.

<넓은 자그레브 역 앞 광장>

  이 땅에는 고대에는 현재 알바니아(Albania) 영토를 포함하는 일리리아(Illyria) 왕국이 있었으며 불렸으며 이후 서부 아드리아해를 접한 지역은 달마티아(Dalmatia)로, 북부 내륙은 판노니아(Panonia)라는 명칭으로 각각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달마티아 속주는 점박이 개의 원산지로 이 개의 이름인 달마시안(Dalmatian)의 어원이기도 하다.

<달마시안 애드벌룬이 놓인 애완동물용품점>

  이후 (서)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이민족이 이주해왔고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슬라브족이 이 땅을 차지한다.

  비잔틴 제국에 지배받던 슬라브족은 10세기 토미슬라브(Tomislav)라는 지도자가 등장하며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독립한다. 토미슬라브는 비잔틴 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서유럽과 손을 잡으며 정교회(Orthodox) 대신 가톨릭(Catholic) 신앙을 받아들인다. 이후 한때 오스만(Ottoman) 제국의 침입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서유럽(베네치아 공화국,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의 영향하에 놓이며 정교회 신앙을 유지한 세르비아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

<크로아티아 왕국을 세운 토미슬라브 왕>

  토미슬라브 왕은 스플리트(Split)에서 동상으로 봤던 그레고리우스 닌(Gregorius of Nin) 주교와 동시대 사람으로 크로아티아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크로아티아어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하여 국어를 발전시킨 그레고리우스 닌 주교와 함께 토미슬라브왕은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을 세움으로서 크로아티아 민족을 형성시킨 사람이다. 지금 크로아티아 국기에서 볼 수 있는 빨간 체스판 무늬는 토미슬라브 왕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미슬라브 광장은 매우 넓고 잔디밭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수많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용된다.

<잔디밭에서 여유있는 휴식><광장 앞 노점 서가>

  광장에서 잠시 쉰 후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니 마침내 자그레브의 중심지 반 옐라치치(Ban Jelačić) 광장이 나타났다.

<자그레브의 중심 반 옐라치치 광장>

  작은 나라의 입장은 참 미묘하다. 크로아티아 왕국이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톨릭과 손잡았으나 이 서유럽은 어느새 크로아티아에 더 많은 부분을 요구하더니 결국 칼끝은 크로아티아로 향했다.

  이때 반 옐라치치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근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끌어내고 헝가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낸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단군왕검처럼 토미슬라브 왕이 크로아티아 민족을 형성했다면 반 옐라치치는 크로아티아를 지켜낸 이순신 장군의 역할이랄까.

<광장 중앙의 반 옐라치치 동상>

  또한 비슷한 위치인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Skanderbeg)의 베그가 호칭인것처럼 그의 본명은 요시프 옐라치치(Josip Jelačić)이며 ‘반’은 백작(Count) 정도에 해당하는 작위라고 한다.

  한때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동상을 없애고 광장의 이름도 바꾸었으나 크로아티아 독립 이후 원상복구 되었다고 한다.

  옐라치치 광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트램 라인 앞에 있어서 과장하면 조금 큰 정류장 정도의 느낌일 뿐이었다.

<증기기관차를 닮은 트램>

  하지만 이곳이 자그레브의 중심지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매우 활기찬 공간이었다. 광장 주변으로는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몰이 들어서 있었다.

<저글링(juggling) 공연 중>

  특히 축제가 한창이라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종 공연이 이어졌다. 이 축제덕분에 시내 호스텔에서 쫒겨났다는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나온다. 하긴, 덕분에 더 좋은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성 마르코 축제? 16. Festival sv. Marka>

  광장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언덕에는 크로아티아의 문장을 가장 잘 볼수 있는곳이 있다. 바로 성 마르코 성당(St. Mark’s Church)이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멀리 보이는 성당 지붕위에 크로아티아 문장이 나타났다.

<저 멀리 보이는 크로아티아 문장>

  가까이서 본 마르코 성당은 더욱 재미있었다. 마치 레고(Lego)로 만들어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아기자기하고 조그마한 성당이었다. 문이 굳게 닫혀있었서 들어가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자체로도 자그레브의 랜드마크라고 할 만한 곳이다.

<레고로 만든 듯한 성 마르코 성당>

  특이한건 수많은 관광객들이 정면에서 사진을 찍는데 누구하나 성당 뒤로 가볼생각은 하지 않는다. 물론 언덕길을 올라오느라 힘들었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뒷면이 궁금하지 않은가?

  전면과는 또다른 분위기이며 마치 용린갑처럼 보이는 작은 녹색 지붕도 볼만했는데…….

<성 마르코 성당 뒤편>

  크로아티아에서 발명된, 크로아티아보다 더 유명한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넥타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때 어떤 책에서 프랑스를 도우러 온 어느 나라 군인들이 목에 감은 천에서 넥타이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 관광청에서도 넥타이는 크로아티아 전통의상의 일부였으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치세하에 붉은 리본을 착용한 크라바트라고 불리는 기병복장이 유럽으로 퍼져나가 현재 넥타이가 되었다고 소개한다.

  실제로 넥타이를 뜻하는 크로아티아어는 kravata이며 프랑스어는 cravate다. 영어에도 cravat이라는 단어가 있다.

<크로아티아 관광청의 넥타이 설명>

  인터넷을 찾아보니 30년 전쟁때 프랑스를 그를 지원하러 온 크로아티아 군인들의 복장에 감명받은 당시 프랑스 국왕 ‘태양왕’ 루이 14세가 넥타이를 매면서 유행시켰다고 한다.

  게다가 루이 14세가 목에 감은 천이 무언지 물어보니 ‘크라바트(크로아티아 군인)라고 대답한 것이 그 어원이라고 한다. 제임스 쿡 선장이 호주에서 신기한 동물을 보고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이 말을 못알아들은 원주민이 “몰라(gangurru)”라고 답한데서 캥거루라는 말이 생겼다는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자그레브 시가지>

  하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30년 전쟁(1618-1648) 당시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 왕가)와 대치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으므로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프랑스를 지원했다는게 납득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크로아티아는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싸운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게다가 1643년 6살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4세(1638-1715)는 30년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도 불과 11살이었으며 마자랭 수상이 섭정하여 실권이 없었다. 아무 힘이 없던 소년왕이 목도리를 맸다고 그게 영향력을 발휘할 리 없다는 생각이다.

<반 옐라치치 광장 근처 번화가>

  영문 위키피디아의 넥타이 항목에는 1646년경 당시 7살이던 소년왕 루이 14세가 프랑스 측에서 싸운 크로아티아 용병의 복장을 착용하면서 프랑스 귀족의 패션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 비약이 심한 듯 하지만 유명 아역배우의 복장이 성인들의 패션을 주도하기 힘든것처럼 이 설은 무리가 있는 듯 하다.

<토미슬라브 광장 뒤편 자그레브 미술관(Umjetnički paviljon u Zagrebu)>

  반면 주 크로아티아 대한민국 대사관이 발간한 ‘크로아티아의 이모저모’라는 자료에는 “1635년에 프랑스왕 루이 13세와 추기경 리슐리외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에 온 크로아티아 용병들이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것이 프랑스에서 유행되어 이후 남성들의 세련미와 우아함의 상징인 넥타이로 자리잡게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1635년이면 루이 14세가 태어나기도 전이며 루이 13세라면 가능한 이야기다.

  또한 크로아티아 유산 박물관의 Robert Jerin이라는 사람은 1635년경 프랑스가 천여명의 크로아티아 용병을 고용했으며 이후 1650년 루이 14세가 이를 착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1650년이면 루이 14세가 많아봤자 11살인데 너무 어리긴 하다.

<다양한 사실의 유래를 모아놓은 genealogy.com에 설명된 넥타이 항목>

  게다가 1635년은 반 옐라치치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끌기 200년 전이다. 만일 프랑스에서 크로아티아 군인(용병)이 활동한게 사실이라면 마치 일제치하 대한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반 합스부르크파 크로아티아 독립군이 개인 자격으로 프랑스편에 참전한게 아닐까?

  비록 넥타이가 자리잡은 계기는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크로아티아가 넥타이의 원조인건 대부분 인정하는 것 같다. 자그레브 시내에서도 넥타이 가게가 종종 보였다.

<대형 넥타이가 걸린 자그레브 시내 Kravata Zagreb>

  그러나 당장 필요없는 넥타이는 제쳐두고 자그레브에서 목과 관련된 가장 멋진 선물은 따로 있었다.

  넥타이? 목? 돼지목살?

  Konzum이라는 대형 마트에 들렀더니 두툼한 목살과 삼겹살을 kg당 20쿠나(약 4,000원) 정도에 판매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추 등 다양한 채소도 있다.

  바로 경남군과 함께 목살 등을 구입했다. 게다가 우주여행자에게 받은 된장과 고추장도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해외에서 먹는 삼겹살이라니.

<인디카 쌀밥에 삼겹살 한 쌈>

  삼겹살은 피로를 씻어내고 고국의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삼겹살을 고추장에 찍어먹는데 크로아티아 친구들이 관심을 보인다. 소스라고 설명하며 권했더니 마치 잼처럼 식빵에 펴 바른다.

  맵다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맛있다는 모습이 여간 우스운게 아니다.

  함께 식사하고 있는 경남군은 여행전에 이스라엘의 키부츠(집단농장)에서 일했었다고 한다. 어리지만 경험도 많고 아는것도 많다. 이역만리에서 한국인과 함께 흔지 않은 키부츠 경험담 등 이런저런 이야기와 삼겹살을 나누는 즐거운 자그레브의 밤이 깊어간다.

<숙소 앞 야경><자그레브의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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