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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India)

027. 산치의 무도사

  산치는 보팔에서 북동쪽 46km지점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보팔보다 숙소비가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실 산치에 온 이유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건축물이 있어서였다. 바로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후, 스투파(Stupa, 부처님의 사리탑)를 세운 것. 아마 현장스님(삼장법사)이나 혜초스님도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빨래였다.

  전날 비로 인해 진흙속에서 건져낸 텐트도 빨고, 간만에 샤워도 제대로 했다. 침낭과 눅눅해진 옷가지를 모두 햇볕에 말렸다. 

  야영을 할 때 골칫거리 중 하나, 물을 구할 수 있으면 미리 준비하여 씻기도 하고, 방법이 없을때는 물티슈를 이용해서라도 대충은 씻는데, 머리만은 제대로 해결 할 방법이 없다. 헬멧 속에서 땀 흘리고 방치하면 근질근질 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을 방책은 자르는 것. 이발을 하기로 했다. Burhanpur에서 이발한지 얼마 안되었으나, 애매한 길이와 들쑥날쑥한 길이 때문에 짧게 다시 자르기로 했다. 9mm정도로 자르면 시원하고 관리도 편할 것 같다.

  마침 시장에 이발소가 있었다. 이발사는 영어를 전혀 못했으나, 옆에 지나가던 청년이 의사소통을 도와줬다. 우선은 50루피 요구하는 것을 30루피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Short cut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 : I'd like to have my hair cut. No shaving 9mm short cut.

  이발사 : 레이저?

  어라? 레이저는 뭐야? 금속같은거 레이저 광선으로 절단하듯이 정밀하게 자르는 옵션인가 보다. 수술도 레이저로 한다지? 마침 부르한푸르에서 들쑥날쑥하게 잘라 준 기억이 났다.

  나 : Yes. Like laser cutting. 

  이발사는 대답없이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릴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날카로운 칼을 가져와서 머리를 밀어 주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나중에 알고보니 laser이 아니라 razor(면도칼)이었다. 이럴수가. 분명히 shaving이 아니라고 했거늘. 그런데 대체 난 왜 이발소에서 레이저 커팅을 생각한걸까?이발사와 엉터리 통역사

  어쨌든 불교의 성지에서 머리를 민 것도 나름 의미있는 것 같다. 다시 붙일수도 없는 노릇이니 상황을 받아들일 수 밖에. 그런데 칼로 민 머리는 바리깡과는 차원이 달랐다. 반질반질함에 계속 머리를 만져보게 되고, 티셔츠를 입거나 벗을때는 마치 벨크로처럼 천이 걸린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한번씩 쳐다보고 간다. 그러고 보니,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스님은 고사하고 머리 민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에휴, 인도인들 관심 끌 요인만 하나 더 생겼구나.

  친구들의 반응은 도올 선생님 같다는 소리부터 다양했으나, 가장 충격적인건 무도사 같다는 동기의 말.머리숱 많은 미키마우스와 묘한 조화. 그리고, 만화주인공 배추도사와 무도사.

  그래도 자꾸 보니 나름 마음에 든다. 시원하기도 하고.

  다음날 드디어 스투파로 향했다. 입장료는 250루피. 역시 학생할인 기타 할인은 전혀 없고, 인도인에게는 10루피만 받는다.

  멀리서 본 스투파 첫인상은 '경주' 같다는 것.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흡사하다. 노동리 고분군 같기도 한 스투파 1, 3번

  우선 스투파 1. 그레이트 스투파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또라나(입구)가 있다. 또라나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새겨놓았다. 하지만, 불교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비유로 표현해 놓아서(부처님을 말이나 보리수 등으로 표현) 보면서도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가장 화려한 북문. 신라 금관 장식이 떠오르는건 왜일까?

  남문은 가장 오래된 문으로 기둥에는 아쇼카 왕의 문양이었던 4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안타깝게도 파손이 심한 남문. 양 기둥의 사자들

  이 아쇼카왕의 사자 문양은 오늘날에도 인도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사자를 갖고 있었다.인도 동전 뒷면의 사자 문양

  서문에는 재미있게 생긴 도깨비 같은 녀석들이 문을 받치고 있다. 자세가 벌서는것 같기도 하다. 손오공처럼 부처님한테 대들었나?이 녀석들의 정체는 뭘까? 

  스투파에 들어가서 바라본 각 문들도 역시 탄성을 자아내었다.북문의 뒤편과, 산치의 전경

  스투파 뒤에는 '짜이따'라는 기둥만 남은 신전이 있었다. 보는 순간 바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떠오른다. 예전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원정을 하면서 동서양 문화가 융합되어 간다라 미술이 탄생했다고 배웠는데, 이게 간다라 미술양식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건 매우 그리스 신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그리스 신전 분위기의 불교사원

  벽돌들 반듯하게 쌓아 만든 돌무더기들은 왠지 첨성대를 떠오르게 한다.첨성대를 만들려다 말았나? 아무리 봐도 경주같다

  뒤에는 또다른 사원이 있었는데, 설명에 따르면 불교-힌두교 넘어가는 시기에 지어져서 힌두교적 요소가 반영되었다고 한다. 힌두교적 요소가 뭘까 생각하며 보니, 전체적인 형태라던가 조각품들을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본 힌두교 사원은 대부분 건물 위에 한쪽으로 치우쳐서, 화려한 조각이 된 탑이 올라가 있는 모양. 전체적으로 'ㄴ'자 형태이다.힌두교적 요소가 반영된 사원 45와 47

이건 심심해서 한컷. 머리를 민 덕분에 이런 사진도 나온다.수행 중

  스투파 3은 관문이 하나뿐인 작은 스투파이다.스투파 3. 부처님의 수제자 두분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푸른 마을 산치는 정말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인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용함. 내가 한국에서 처음 생각했던 인도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곳이기도 하다. 큰 기대없이 왔으나 왠지 횡재한 기분. 특히 내가 묵은 숙소는 기차역 바로 앞이었는데, 기차 지나가는 소리도 참 좋았다. 계속 머물고 싶은 아름다운 산치.공터에서 어린이들이 노는 모습

  하지만 이곳도 떠나야 한다. 어쩌면 나는 여행에 참 안어울리는 사람 같기도 하다. 만남에 대한 설레임보다 헤어지는 아쉬움이 더 크니 말이다.

  그 분위기까지 너무나 경주와 흡사한 산치는 휴식과 장비 정비 뿐만 아니라 인도의 도로에서 언짢았던 마음까지 달래주는 곳이었다.정전 때문에 가스등 켜놓고 공부하는 모습(New Jaiswal Lodge의 주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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