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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Bulgaria)

074. 벨리코 터르노보와 루세에서의 추석

  9월 15일. 약 2주간 정들었던 소피아를 떠났다. 이 날도 날씨를 지켜보다가 중식 이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소피아를 벗어나기 무섭게 나타나는 오르막은 끝없이 이어졌다. 보통 산악지형은 오르막 내리막의 반복이었는데, 이곳은 한 번 올라가기 시작하면 몇 시간씩 이어진다. 상당히 특이한 지형이었다.

<끝없는 산 거의 정상에서>

  물론 내리막길도 길다. 한 번 내려가기 시작하니까 거의 45~50km/h의 속도로 30분 이상 내려간다. 속도 때문인지 쌀쌀하게 느껴져서 바람막이를 꺼내야만 했다.

  Botevgrad란 마을을 지나 5km정도 가니 한 주유소가 나타났다. 주유소에서 물 한병을 사면서 주위 공터에 텐트를 쳐도 되냐고 하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주유소 뒤뜰에서 숙영>

  허락 뿐만 아니라 주유소의 화장실도 사용하게 해 주셔서 편안하게 씻을 수 있었다. 주유소 앞 테이블에는 콘센트까지 나와 있어서 전기제품 충전도 할 수 있었다.(주행거리 62.80km, 누적거리 5,934km)

  편안히 쉬고 다시 출발. 산길은 계속 험하고, 이번에도 긴 오르막은 진을 다 빼놓는다. 오르막 때문인지, 너무 오래 쉬어서인지 어째 기운이 나지 않는다. 이날 목표는 로베치(Lovech)라는 마을.

  목표지점 25km가량 앞에서 식사를 위해 주유소에 딸린 한 가게에 멈춰 섰다. 쿄프테 하나에 0.8레바(약 640원). 저렴한 가격 덕분에 간만에 식당을 이용한다.

<쿄프테 3조각. 약 2,000원으로 단백질 보충>

  쿄프테는 고기를 다져서 구운 음식으로 햄버거 패티와 비슷한 느낌이다. 터키에서도 크기는 더 작지만 비슷한 음식을 똑같이 쿄프테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오스만 시대에 터키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식사를 하고 나니 갑자기 피곤하고 귀찮아져서 근처 공터 캠핑을 허락받고 바로 숙영 준비.(주행거리 77.01km, 누적거리 6,011km) 역시 주유소에서 숙영하면 씻기 편해서 좋다.

<아침. 침낭 일광소독 중>

  씻기만 좋은게 아니다. 막상 길을 나서 보니, 30km 내에 텐트 칠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아마 전날 주유소를 놓쳤으면, 해지고서 숙소를 찾아 해메였을 뻔 했다.

  여전히 산길은 이어지고, 도로 상태도 좋지 않다. 진짜, 아스팔트가 아까워서인지 아주 얇게 흩뿌려놓은 것 같은 도로포장상태.

<소보로빵 표면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냐?>

  그래도 소보로빵이 어디냐. 달 표면같은 인도에 비하면 감지덕지지.

  알고보니 이 곳은 바로 발칸(Balkan) 반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발칸 산맥이었다. 계속 산에 올라왔고, 이제는 능선을 타며 달리는 중이다. 산길은 제법 험했지만, 경치가 좋아서 만족할 만 하다.

  드롭킥을 날리는 듯한 조형물과 함께 세블리에보(SEVLIEVO)라는 마을이 나타나더니 도로 포장 상태가 바뀐다.

<아, 드롭킥이 아니라, 모자(母子)였다>

  자전거를 타면 아스팔트의 상태가 그대로 전해진다.

  겉보기에는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바퀴 굴러가는 느낌도 소리도 다르다. 불가리아 도로포장이 대체로 좋지 않지만, 대신 잘 포장된 길이 나올때는, 부드럽게 나아가는 느낌이 비단길을 달린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우레탄 도로처럼 푹식푹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발칸 산맥. 산길임이 그대로 느껴지는 도로>

  어느 새 산은 멀어지고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만간 마을이 나오겠구나.

<이런 황량한 들판도 많다>

  역시 예상대로다. 들이 계속되다가 어느새 도시로 바뀐다. 벨리코 터르노보(Veliko Tarnovo)에 진입한 것이다.

<드디어 벨리코 터르노보>

  원래 계획은 벨리코 터르노보에서도 호스텔 모스텔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약 4km정도만 가면 된다. 지도를 살펴보는데 한 녀석이 접근하더니 호텔을 찾냐고 묻는다.

  목적지는 있지만, 가격이나 알려고 물어보는데 호스텔 모스텔의 도미토리보다 저렴한 가격에 싱글룸을 주겠다는 것. 숙소도 더 가깝다고 한다.

  호객행위꾼을 따라다녀봤자 좋을 것 없다는것은 알지만 가까우니까 한 번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거리는 가까운데 이건 완전 언덕 위다. 한국이면 딱 달동네일 위치.

  게다가 호텔은 간판도 없다. 호객꾼은 데려다 주기만 했고, 나이 지긋한 주인은 영어 한마디도 못한다. 이거 호텔 맞아? 그런데 방을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벨리코 터르노보의 숙소>

  이건 그냥 집이었다. 방에는 책상과 테이블, 쇼파와 장농까지 있었다. 아하. 그냥 가정집인데 빈 방을 이용해서 불법(?) 영업하는 거구나. 그래도 넓찍한 방에 테라스까지 딸려 있다. 아마 여기도 자녀들이 해외 취업해서 방이 남았나 보다.

  도미토리보다 훨씬 나은 듯 해서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주행거리 87.70km 누적거리 6,099km)

<Майка България 광장의 야경>

  다음날은 벨리코 터르노보 시내 구경을 위해 길을 나섰다. 벨리코 터르노보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였고, Tsarevets라는 언덕 위에 오래된 요새가 있다고 한다. 참, 벨리코는 크다(大)라는 뜻이라고 한다. 

<멀리 보이는 성벽>

  이 요새는 12세기에 지어졌다.

<입구에서 보는 요새><망루가 보이고>

  요새에 들어가니 고3때 열중했던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Age of Empire)투석기(Catapult) 노포(Ballist)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무기가 있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게임이 현실을 모사했겠지.

<게임 속으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Catapult와 Ballist><망루에 올라서서>

  요새 정상에는 교회가 있었다. 역시 정교회(Orthodox)였다. 내부에는 여느 성당처럼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이 그림이 특이하다. 흔히 보는 정교회와 달리 마치 엘 그레코를 연상시키는 회색 톤의 작품이었다.

<독특한 벽화를 가진 교회 내부>

  요새를 내려와서 시내를 좀 더 돌아보았다. 마침 다음날이 추석이다. 설과 마찬가지로 추석도 길에서 혼자 보내겠지? 마침 좋은 숙소에서 쉬는데 저녁은 특식으로 먹고 추석 기분이라도 내기로 했다.

  불가리아에 왔으니 요구르트를 포함하여 평소 비싸서 안 먹던 음식 이것저것 샀다. 혼자이므로 최소 단위로만 샀으나 모이니 제법 많다. 결국 다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했다.

  이제 진짜 추석. 다시 길을 나선다.

<산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의 도로>

  발칸 산맥을 타고 가는 길이다. 갓길도 없고, 도로까지 침범한 나뭇가지로 인해 달리기가 쉽지 않다.

<나무 사이로 달리는 운치있는 길>

  벨리코 터르너보 시내에서부터 의아한 점이었는데 여기 산은 꼭 일부러 깎아놓은 듯한 바위벽이 자주 보인다. 멀리서 얼핏 보면 성벽같기도 하다.

<산에 두른 병풍인가?>

  가끔 들판도 나타나지만 계속하여 산길의 연속이다.

<간만에 보는 넓은 들>

  어라? 그런데 이게 뭐지? 수풀 사이에 빨간색이 보인다. 단풍인가?

  물론 한국의 단풍나무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단풍도, 낙엽도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날씨가 서늘해져도, 추석이라도 날짜만 세었지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숲 속의 빨간 잎을 보며 마침내 가을이구나를 실감했다.

<숲 속의 빨간 잎>

  잠시 한국 생각도 하며 상념에 빠질 틈도 없이 계속되는 오르막길.

<잡생각을 할 틈도 없이 엄청난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날은 저물기 시작하는데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급한대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길가에 식당이 있고, 옆에 폐 주유소가 있었다. 오, 저기 텐트를 치면 비는 피하겠구나

  주유소 처마밑에 자리를 잡는데 식당 주인이 경찰이 온다고 캠핑은 안된다고 한다. 대체 무슨 소리이지? 국경이 가까워서 그런가?

  캠핑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친절한 식당 주인은 식수를 한 컵 주면서 20km 정도만 더 가면 루세(Ruse)라는 도시가 있다고 힘내라고 한다. 어쩔 수 없다. 비가 더 심해지기전에 다른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마침내 루세 경계에 진입>

  루세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진다. 추석인데 보름달은 커녕 쫄딱 젖었다. 지금까지 여행 중 가장 심한 비였다. 날은 어둡고, 캠핑 할 곳도 없고, 젖으니 추워서 어쩔 수 없이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가이드북을 펼쳤는데 하필이면 이 동네는 몇군데 없는 숙소도 다 비싼 곳 뿐이다.

  그 중 가장 저렴한 English Guest House라는 곳에 했다. 저렴하다고 해도 40레바(약 32,000원)나 한다. 덜덜 떨면서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들어갔는데 빈 방이 없다는 것.

  그런데 비가 오고 갈 곳은 없으니, 식당에 무료로 자리를 내 주겠다고 하면서, 대신 내일 조식(07:00) 전에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괜찮겠냐는 질문. 나야 물론 좋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생각 이상의 지원이었다. 맨바닥이라도 괜찮은데 미안할 정도로, 소파에 매트리스와 시트까지 깔아주고 장소를 제공한다. 샤워도 하라고 하고 자전거는 창고를 열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쉴 곳이 생기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중식도, 석식도 안먹었구나. 기왕 젖은 거, 샤워하기 전에 슈퍼에 갔다오기로 했다. 아 이게 실수였다.

<식당을 개조한 침대와 40레바짜리 진짜 숙소>

  슈퍼에 다녀오니, 말이 바뀌었다. 다시 확인해 보니 빈 방이 있다고, 그쪽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비가 많이와서 누군가가 예약을 취소했나 보다. 그냥 식당에서 자고 있었으면 깨우지는 않았을 텐데. 좋다 말았네.

  그래. 추석인데 고향은 못가지만 좋은 데서 하루 쉬자……. 다행히 시설은 매우 좋았고 혼자 2인실을 쓰게 되어 젖은 옷과 침낭도 다 널어놓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2013년 추석은 가을비에 푹 젖은 채로 불가리아 국경마을 루세에서 마무리했다.(주행거리 108km, 누적거리 6,20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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