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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Slovenia) / 슬로바키아(Slovakia)

155. 슬로우베니아(Slow-venia)와 독도법(讀圖法)

  밤새 한차례 비가 쏟아졌나 보다. 텐트에는 송골송골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빗물이라도 말리고 가야겠다.

<빗방울 맺힌 텐트 알 아랍>

  주위를 살펴보니 전날 보이지 않았던 민가가 보인다. 좀더 쉬다 가려고 했는데 바로 출발하는게 낫겠다. 마침 식량도 다 떨어졌다. 산속에 슈퍼마켓이 있을리 만무하니 피곤해도 빨리 벗어나는게 상책이다.

  일단 주행을 위해 옷부터 갈아입었다. 빗속에서 야영하면 옷에 습기가 남아있어 상당히 불쾌하다. 옷이 눅눅한데 배까지 고프니 참 처량하다.

  그런데 누군가 텐트에 찾아와 뭐라고 외친다. ‘빨리 나가라는 소리구나’

  “곧 나갈게요”라고 대답하며 텐트를 열어보니 한 아주머니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가라면서 비닐 봉지를 하나 내민다. 봉지에는 하나하나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고마운 아주머니가 싸 주신 샌드위치>

  사실 전날 케밥하나 먹기는 했지만 양에 차지 않았고 비싼 물가 때문에 더 살 수도 없어 매우 허기진 상태였다.

  수차례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마움을 기억하기 위해서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다고 말하니 아주머니는 손사래치셨고 이름조차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그저 감사한 마음은 마음속에 새길 수 밖에 없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니 힘이 난다. 한결 여유있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전날 숙영지는 안전하고 편한 위치였으며 경치 또한 기가 막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광경이었다.

<좌측 빨간 지붕이 친절한 아주머니의 집>

  ‘부유하고 넉넉한 여정은 아니지만 풀밭에 누워 편하게 잘 잤고 배도 채웠으니 뭐가 부족한가’ 갑자기 흐뭇해진다.

<평온한 시골 풍경>

  전날 힘겹게 올라온 만큼 한동안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내려다 보이는 산과 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얼룩소와 맑은 호수까지. 정말 목가적이고 평온한 풍경이다. 길도 평탄한데다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어 위험하지도 않아 정말 기분좋게 달렸다.

<호수 낀 마을>

  슬로베니아(Slovenia) 역시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멋진 나라였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도 차량은 물론 사람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토요일이라서 집 안에서 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집은 있는데 사람은?>

  신경쓸 요소가 없는데다 조용하니 주행 중에 졸릴 정도다. 정말 인구가 적다는 말이 맞구나. 전날 마르코와 토마시가 말한 조금은 따분한 나라라는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이런 길은 느긋하게 즐기는 편이 더 좋다.

<조용한 슬로베니아><세르비아풍 성당이 있던 Lenart>

  다시 한참을 달려 오르막이 시작되는 Cerkvenjak이라는 마을에 접어들자 무궁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 얼마만에 보는 무궁화인가, 괜시레 기분이 좋다. 무궁화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역만리에서 만난 무궁화><푸르른 슬로베니아>

  그런데 너무 한적해서인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439번 도로를 타고 가다 작은 산을 넘고 Logarovci에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면 Boreci의 사거리가 나오고 계속 직진이다.

  하지만 사거리가 아니라 오거리가 나왔다. 북동쪽으로 직진할 수 있지만 밭 사이를 지나는 샛길이라 심히 미심쩍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나침반을 따라 샛길에 진입해 보니 금세 우측으로 꺾어진다. 이 길이 아니다. 무엇보다 여기는 Boreci가 아닌 것 같다.

  한참 지도를 보며 그동안 온 길을 되짚어봤지만 방향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작은 마을에서 철도건널목을 지나면 바로 북동, 북서, 남서, 남동 방향 사거리가 나와야 하는데 길은 북동, 북서, 남서, 남남동, 동남동의 5거리다.

  ‘분명히 마을과 철도건널목을 지났는데, 대체 어디서 잘못된거지?’

  뭔가에 홀린 기분이다. 길에는 표지판도 없고 옥수수 밭 뿐이라 현 위치를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고 싶으나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소축적 지도는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헤맨 오거리>

  이럴 때는 휴대폰 GPS 기능이 큰 도움이 된다. 인도에서는 마을간 거리가 멀고 길가에서 충전도 할 수 없었기에 GPS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가도로가 많은 UAE에서는 정말 유용하게 활용했다.

  유럽으로 넘어온 후에는 휴대폰 충전이 용이했지만 도로 표지가 잘 되어 있어 시가지 외에는 GPS 기능을 쓸 일이 그다지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그레브에 머무는 동안 휴대폰이 고장났다. 무슨 일인지 GPS 신호를 수신하지 못하고 SIM카드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외 기능은 문제없이 작동하지만 계속 SIM카드를 찾다 보니 배터리가 순식간에 소모된다.

  그래도 그동안은 대략의 경로를 담은 지도와 표지판만으로도 위치를 찾는데 지장이 없었기에 더 이상 준비하지 않고 나왔는데 여기서는 이 방법이 안통한다.

<이런 폐가도 있네>

  온 길을 되돌아가 보기도 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며 거의 한시간을 헤맨 것 같다. 이렇게까지 길치는 아니었는데…….

  방향이 틀린 것 같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북서쪽 길로 1km가량 가 보니 마침내 Boreci에 진입할 수 있었다. 마침내 찾았다!

  다시 확인해 보니 경로를 조금 단축해보겠다고 샛길로 잡은게 화근이었다. 정한 경로를 지나쳐 다음 길에서 북동쪽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이 길은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아 더욱 헷갈렸었다. Boreci에 도착하니 표지판이 있었고 마침내 바른 길에 들어섰다.

<쉽지 않은 슬로베니아 도로>

  Mura 강을 건너자 끝없이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신작로는 잘 닦여 있었고 이륜차 전용도로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한동안 보이지 않던 거리가 표시된 국도 표지판이 나타났다. 쳇, 길 찾고 나서야 눈에 띄다니. 표지판에는 흥미롭게도 쉼표(,)를 소숫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늦게 나타난 표지판>

  에구, 너무 지체했구나. 전날 산로(山路)베니아라고 느낀 이 나라는 슬로우(Slow)베니아가 더 어울린다. 한없이 느린 발걸음. 아무튼 갈 길이 머니 부지런히 달려야겠다.

<그래도 쉴땐 제대로 쉬어야지>

  어딘가 정교회의 느낌이 나는 sv.Trojice 성당이 있던 Odranci를 지나 Črenšovci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이제 유로화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배가 고프다. 그런데 도무지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계속 달릴 뿐이다.

<정교회풍 Sv.Trojice 성당>

  몇 개의 마을을 더 지나쳤지만 영업중인 가게가 없다. 벌써 문을 닫다니. 허기를 참으며 달릴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왜 마을에 가게가 없는거냐>

  21시가 조금 지나 국경 근처의 Lendava라는 마을에서 대형 쇼핑몰을 발견했다. 여기다. 그런데 쇼핑몰 입구에 도착하니 바로 불이 꺼졌다. 아,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 헝가리(Hungary)가 물가는 더 싸다던데, 헝가리에 가서 배를 채워야겠다. 헝가리로 가는 도로는 더욱 한산했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어둠을 뚫고 9km 가량 달리자 마침내 Pince 마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에는 쉥겐(Schengen) 국가답게 검문소 대신 표지판만 하나 덩그러니 서 있었다. 하마터면 헝가리 입국 소식도 지나쳐버릴 뻔 했다. 표지판 앞 기념촬영을 끝으로 세르비아에서 시작해 거의 7개월을 머물렀던 구 유고슬라비아(Former Yugoslavia) 자전거 여행을 마쳤다.

<산꼭대기 마을 Cerkvenjak>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오래 머물렀다지만 사실 슬로베니아는 단 1박2일 체류했을 뿐이다. 이 짧은 기간에 슬로베니아를 논할 수는 없다.

  여기서 조금 더 머물렀어도 좋았으련만 뭐가 그리 급했는지 스쳐 지나쳤을 뿐이다. 다만 슬로베니아에서 받은 이상은 아름다운 농촌을 가진 나라이며 인구는 적지만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였다.

  슬로베니아 여행은 최악의 독도법(讀圖法) 사태와 마지막 구간 허기짐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특히 고마운 아주머니로 인해 여타 유고슬라비아 못지 않게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슬로베니아 자전거여행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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