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슬로베니아(Slovenia) / 슬로바키아(Slovakia)

165.청기와 성당과 동상의 도시 브라티슬라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구시가지는 발칸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차량 출입이 통제된 좁은 도로와 파스텔톤의 웅장한 석조건물이 고풍스러운 멋을 더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 진입>

  사람들은 까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게다가 무슨 축제라도 열렸는지 소규모 밴드가 행진하며 음악선물까지 선사해줬다.

<마칭밴드의 음악선물>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수많은 동상이다. 동상으로 도배했다 싶은 마케도니아(Macedonia; FYROM)의 스코페(Skopje)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조형물이 제법 많다.

<함께 달릴까요?>

  구시가지 외곽의 자전거 상이 가장 먼저 브라티슬라바 자전거 여행을 반겨줬다. 광장에는 곰돌이가 포효하는가 하면 길 모퉁이 ‘작업 중(Man at work)’ 표지판 아래 맨홀에는 한 남자가 미소짓고 있다. 이름은 ‘감시자(Watcher)’. 그는 왜 이곳에 숨어있는 것일까?

<정체모를 불곰 한 마리>

  ‘론니플래닛’ 가이드북은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The most photographed sight)으로 교회나 성 대신 이 동상을 꼽는다. 이 외에도 시내 곳곳에 설치된 다른 동상도 소개한다.

<감시자와 함께>

  Schöner Náci는 실크햇을 씌워주려는 친절한 어르신이다. 하지만 호의에도 불구하고 모자를 쓰기에는 키가 미치지 못했다.

<아, 키가…….>

  모자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바이콘(Bicorne, 二角帽)을 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중앙광장인 Hlavné námestie의 한 벤치에는 바이콘을 쓴 남자가 비스듬히 기대고 있다. 사실 바이콘은 18세기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던 제식 군모(軍帽)였으나 어쩐 일인지 나폴레옹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대체 나폴레옹이 왜 여기에 있을까? 일단 이곳은 프랑스 대사관 앞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나폴레옹과 함께>

  여기서 120여 km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Slavkov u Brna라는 마을이 있다. 체코(Czech)의 영토이지만 체코의 수도 프라하보다 브라티슬라바에서 더 가까운 곳이다. 이름도 생소한 이 작은 마을은 바로 나폴레옹이 활약한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의 현장이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전투 후 브라티슬라바를 거쳤을 것이다.

<브라티슬라바 시내>

  과거 보헤미아 왕국(Kingdom of Bohemia)은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을 거쳐 오스트리아(Austria)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나라다.

  한편 나폴레옹은 자유·평등·박애로 대표되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유럽에 전파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또한 그가 신성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

  혹시 보헤미아에서 프랑스군의 위상은 우리의 광복 후 또는 한국전쟁 후의 미군정도가 아니었을까? 당장 인천 월미도에도 맥아더 원수의 동상이 서 있으니까 무리한 추리는 아닐 것이다.

<슬로바키아 국립극장>

  게다가 당시는 앞서 두 차례나 빈(Wien)을 포위하면서 세력을 과시한 오스만(Osman) 제국이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던 시기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오스트리아와 함께 할 이유도 없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며 동상이 놓인 정확한 이유는 물론, 이 남자가 나폴레옹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론니플래닛에도 단지 ‘프랑스인(Frenchman)’이라고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어디나 즐비한 동상, 이분들은 혹시 키릴 형제?>

  무언가 메모하려는 듯한 Hviezdoslav는 아마 작가겠지? ‘슬라브’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름은 아마 본명이 아니라 ‘슬라브의 000’와 같은 호칭이리라…….

<작가? 시인? Hviezdoslav>

  물론 구 동구권 답게 프로파간다(Propaganda, 정치선전)에 충실한 작품도 있다.

  전우를 호송하는 부상병의 아래에는 “KTO PADNE V BOJI ZA SLOBODU, NEZOMIERA. HRDINSKÝM BULHARSKÝM PARTIZANOM KTORI POLOŽIU ŽIVOT ZA NAŠU SLOBODU”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파르티잔(Partizanom)이라는 문구에서 동상의 성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을 다쳤음에도 전우를 돌보는 부상병>

  중앙광장의 명소인 롤랜드 분수에도 여지없이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이 분수를 발주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다. 분수는 원래 소화전이었다고 한다.

<롤랜드 분수와 막시밀리안 2세>

  이 외에도 즐비한 동상이 도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브라티슬라바는 가히 동상의 도시라고 부를 만했다. 동상 수는 훨씬 많지만 썩 어울린다는 느낌은 없었던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와는 딴판이다. 어쩌면 이런 느낌은 스코페의 Bojan에게 들었던 무분별한 동상 건립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에 기인한 건지도 모를일이다.(관련글 : 106. 호부호형을 원하는 마케도니아)

  근처 Hviezdoslavovo námestie 광장에는 민속공연이 한창이다. 어라? 이번 팀은 감시자 앞에서 본 마칭밴드네?

<민속의상 입고 상설무대에서 공연>

  공연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거리의 대형 방석에 드러누워 늦여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저런 시설은 비에 약할텐데……. 브라티슬라바의 여름은 강수량이 적은건가 아니면 매일 정리하는 걸까?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발칸반도에서 종종 보이던 길거리 체스도 여전하다. 다만 관객들은 옹기종기 모여 거들던 발칸반도와는 달리 방관할 뿐이다. 함부로 훈수를 두었다가는 따끔한 눈총을 각오해야 할 분위기다. 이것도 발칸반도보다 ‘개인적인’ 서유럽의 모습인지도 모를 일이다.

<위기, 일단 피하고 보자>

  음악과 함께 광장을 거늰 후 푸른 성당(Modrý kostol)으로 향했다.

  이름에 어울리게 흰색과 청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다만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새파란 색은 아니고 하늘색에 가깝다. 파란 하늘이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자연에서 원색을 볼 일은 드물다. 특히 슬로바키아(Slovakia)와 같은 내륙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색을 자연의 모사라고 한다면 푸른 성당은 슬로바키아의 ‘하늘색’을 충실히 모사한 것 같다.

<푸른 성당>

  대체 왜 하늘색일까? 혹시 하늘빛을 담은 성당은 ‘천국(Heaven)’의 상징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인도에서 본 힌두 신상이 떠올랐다. 신들이 대개 스머프처럼 푸른 피부를 갖고 있는 이유는 ‘하늘’에 살고 있기 때문란다. 푸른 성당이 천국의 표현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역시 푸른 계통의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된 머릿돌은 이슬람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아마 이건 오스만 제국의 영향일 것이다.

<타일로 장식한 성당 머릿돌>

  게다가 본당 지붕은 무려 ‘청기와’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실 기와를 한국적인 건축재료라고 생각했으나 유럽에도 흔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붉은 기와다. 외국에서 청기와를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 자체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지만 미색 석조건물이 만건곤(滿乾坤)한 사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한 푸른 성당은 더욱 신비로웠다.

  사실 성당 내부도 파랗다고 들었지만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미사가 열리고 있는데다 자전거를 달리던 복장이 성당 입장에는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 매죽헌 성삼문>

  어쩔 수 없다. 다음날을 기약하며 푸른 성당을 떠나 브라티슬라바 성으로 향했다. 도로와 주택 사이는 제법 높은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외부인의 출입을 막을 뿐 포격에는 그대로 노출된 구조다. 성벽이라고 보기에는 초라하다.

<브라티슬라바 성으로>

  성은 해발 200m정도의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경사가 제법 가파라서 자전거로 오르기에 힘겨웠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성은 그다지 멋진 건물이 아니었다. 론니플래닛은 “밥상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The castle’s look is often likened to that of an upturned table)”고 혹평했다. 내 눈에는 밥상보다는 학교나 호텔처럼 보인다.

<밥상인지 학교인지>

  게다가 성 입장시간이 지나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뭐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 성이니 큰 아쉬움은 없다. 차라리 근처 계단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게 더욱 즐겁다.

<애써 올라왔으나 굳게 닫힌 성문>

  어느새 슬슬 잠자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생각 같아서는 브라티슬라바에 묵으면서 푸른 성당도 다시 가보고 시내 곳곳을 더 살펴보고 싶지만 30유로 선인 시내 숙소가격이 부담스럽다. 더 찾아보면 분명 저렴한 숙소도 있겠지만 이제는 알뜰해져야 한다. 바로 출발하자.

<전망 좋던 계단>

  언덕을 오르기 힘들었던 만큼 내려갈때는 수월하다. 성 아래는 도나우(Donau)강이 흐른다. 헝가리(Hungary)와의 국경선을 형성하던 도나우강은 어느샌가 슬로바키아로 파고들었다.

  강은 브라티슬라바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두 갈래로 나뉜다.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이르며 오스트리아·체코와의 국경선 역할은 남북으로 흐르는 지류와 교대한다. 이 강줄기는 모라바(Morava) 강이라고 불린다. 중동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가 있다면 브라티슬라바는 모라바강과 도나우강 사이 평원의 부채꼴 지대(Riverside Gibbous)다.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며>

 이제 도나우강을 건너기 위해 Nový Most(New Bridge)라는 다리를 지난다. Most는 슬라브어로 ‘다리’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에서 본 Stari Most(Old Bridge)를 떠올리면 쉽다.

  이러한 Nový Most의 별명은 UFO 다리다. 그러고 보니 다리의 조형물이 고전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우주선과 닮아 보인다.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UFO 전망대에도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고깔 벗은 대전엑스포 한빛탑, 혹은 UFO 다리>

  다리를 건너자 구시가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파트촌이 맞아준다. 도로도 시원하게 뚫려 있다. 저무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슬슬 속도를 내 볼까?

<신도시 느낌의 아파트단지>

  그러나 순식간에 오스트리아 국경이 나타났다. 관운장은 술이 채 식기도 전에 화웅을 처리했다지? UFO 다리에서 국경까지의 시간이 그 정도일 것이다. 당연히 국경 검문소는 없다. 지도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달려보니 허탈할 정도였다.

<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국경>

  사실 슬로바키아에 머문 시간도, 달린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다. 다시 지도를 봐도 남서쪽 끝단에 발만 담궜다 뺀 정도다. 이 나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반겨주던 노부부와 기념촬영, 또 눈 감았다>

  그래도 굳이 슬로바키아를 평가하자면 충분히 매력이어서 다시 오게 된다면 더 머무르며 찬찬히 둘러보고 싶은 나라였다. 저무는 해와 함께 여러모로 ‘싱거운’ 슬로바키아 여행을 마무리했다.

<슬로바키아 여행 경로>

 오스트리아  다음글 ☞ 166. 아시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