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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Austria)

167. [자전거여행 외전]정통성에서 보편성으로 - 정교회에 얽힌 이야기

  대체 발칸반도를 지배해 온 정교회라는게 뭘까? 사실 그리스 정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이내 제우스, 포세이돈 등을 떠올릴 정도로 무지했다.

  이 정교회는 기독교의 일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AD.313) 이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11세기에 들어 성상에 대한 해석 등을 두고 동서로 분열한다. 흔히 동방교회를 정교(Orthodox; 정통적인)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천주교라 불리는 가톨릭(Catholic; 보편적인)은 서방교회를 일컫는 말이다.

  그간 보아온 가톨릭과 정교회를 간단하게 비교해 보았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간단한 비교>

  물론 겉보기만으로 교회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가톨릭도 종종 이중 십자가를 사용하며평범한 십자가를 사용한 정교회 성당도 있었다. 또한 건축 양식은 지역과 시대상 등을 반영한다. 불가리아 벨리코 터르노보(Veliko Tarnovo)의 성당은 정교회 이콘 대신 엘 그레코(El Greco)를 연상시키는 회색 성화가 그려져 있어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물며 의자 따위는 더더욱 기준이 될 수 없다. 일례로 불가리아 루세(Ruse)의 Sveta Troitsa 성당은 정교회 성당이지만 의자가 깔려 있었다.

<회색 성화가 그려진 벨리코 터르노보 Tsarevets 요새의 성당>

  일단 가톨릭은 그 이름처럼 지역, 문화의 차이에 따른 특수성을 인정한다. 당장 김대건 신부의 초상만 봐도 신부의 수단과 모자를 쓰는 대신 갓에 도포차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보편적인 가톨릭은 바티칸 교황청을 중심으로중앙집권화를 이룬 데 비해 정통성을 강조하는 정교회는 불가리아 정교, 루마니아 정교,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 정교 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지방분권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비록 콘스탄티노플리스 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를 겸하고 있지만, 정교회의 각 교구는 단순한 행정구역 차이를 넘어 시스템 자체가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이 와중에 하필이면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라는 단어를 먼저 접하면서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다.

  <갓에 도포를 갖춘 김대건 신부 - 출처 : 솔뫼성지>

  정치던 종교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포기하는 집단이 어디 있으랴. 아마 정교회의 이런 모순은 정치상황 때문인 듯 하다.

  동,서 로마제국의 황제는 교회분열 후 자연스럽게 각각 동,서 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그리고 동방 교회를 보호하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진 후 제국의 영역은 이슬람화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흔히 알려진 칼이냐, 코란이냐는 없었다. 약탈은 사흘에 그쳤고, 그 후에는 단지 세율을 올리는 등 각종 차별을 뒀다고 한다. 차별이라고는 해도 이슬람 포로를 가차없이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리던 십자군에 비하면 획기적인 처사다. 게다가 정복자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임명한 덕분에 정교회는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간다. 다만 이 과정에서 총 대주교의 권위는 더 이상 전체 교회를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었을 것이다.

<루마니아 루세의 정교회 성당 내부>

  물론 술탄의 자비가 단지 이교도에 대한 너그러움만은 아닐것이다. 무력으로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천년을 이어온 대제국의 국교였던 정교회는 이미 삶 속에 파고들어있었다. 대놓고 개종을 강요하면 반발만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종교권력은 쉽게 정치권력화 될 수 있고 종교가 피지배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면 통치가 더욱 어려워진다. 피지배민들이 정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을 술탄은 정교회를 적당히 인정하면서 분열을 조장하는게 손쉬운 통치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이스탄불이 되어버린 콘스탄티노플의 정교회가 술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 동안, 정교회의 일부는 술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러시아로 건너가 독자적인 정통성을 주장했다. 이는 중국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망명한 티벳불교의 수장 달라이라마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발칸반도의 정교회는 계속하여 오스만의 통치에 저항하면서 민족혼이 되어버렸고 400년간의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해낸다. 오늘날 중국이 인권조차 무시하며 티벳불교와 이슬람을 박해하는 배경이나, 공산당이 종교지도자(후임 달라이라마)를 결정하겠다고 하여 전 세계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배경 역시 이를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대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복자 술탄 메흐메드 2세-이스탄불 전쟁박물관>


  그러면 서쪽의 상황은 어떨까?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로마와 황제라는 명칭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전유물이 되었다. 여러 나라로 쪼개진 서유럽에는 왕권이 약화되었고, 군사력이 없는 교황의 권위도 급속도로 추락했다. 그러나 교황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졌다. 점점 세력을 넓혀가던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와 연합한 것이다. 샤를마뉴를 황제로 옹립(800)한 교황은 황제 위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교황의 인정이라는 명분을 갖춘 샤를마뉴의 권위는 서유럽의 여러 소국을 넘어 제국 대 제국으로 동로마 황제와 동등한 위치에 올랐다. 마침내 가톨릭은 독실한 신앙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라 황제가 된 샤를마뉴를 이용해, 무력으로 서로마를 무너뜨린 세력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동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대공은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천명하며 황제(차르)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서방의 정치-종교 연합은 이를 기획한 종교세력이 승리했으나, 동방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교회보다는 정치세력이 더 큰 이득을 본 것 같다. 어쩌면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이 러시아를 키워 준 셈이다.(재미있게도 몇 세기가 후 술탄은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이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받는다.)

<검은 두루마기에 수염을 기른 불가리아 정교회 사제>

  앞서 언급한 동서 교회 분열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표면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성상 논쟁이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 교리 상 조형물을 섬길 수 없다. 하지만 가톨릭은 성상 제작을 허용했다. 일반적으로 게르만족에게 포교하기 위해 숭배대상을 구체화 할 필요가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게 교회 분열을 불러왔다. 여러 면에서 대립하던 동서 교회는 결국 상호 파문을 선언하며 각자의 길을 걷는다. 물론 이는 명분일 뿐, 균열의 진짜 이유는 더 깊은 수준의 신학적 해석 차이와 함께 일부 이해관계도 있었을 것이다.

  교회분열의 상징인 성상 논쟁은 지금까지도 유효한가보다. 나 역시 정교회 성당에서 성상을 본 적은 없다. 성화는 있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정교회 신도들은 성당에 들어가면서부터 성화에 입을 맞추며 예를 표한다. 성화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소리다. 조각은 우상숭배이지만 그림은 상관없다는 시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성상과 의자가 없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Sveti Marko 성당>

  이콘(Icon,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아이콘의 어원)이라 불리는 정교회의 성화는 대체로 정형화된 양식(머리 뒤에 후광, 각종 상징 등)으로 표현된다. 누가 그리던 결과가 비슷하여 화가가 부각되지 않는다. 그림 자체를 간단히 표현하면 정교회 성화는 만화혹은캐리커쳐같은 반면, 가톨릭 성화는 전반적으로 사진같은 느낌을 주지만 화풍이 천차만별이다. 가톨릭의 화가들은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자신의 방식으로 성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 화가들에게 성화는 신앙심의 발로임과 동시에 일종의 수익 모델이었을 것이다. 몇몇 화가들은 개성있는 성화를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14세기 이전의 가톨릭 성화는 정교 이콘과 대동소이하다. 가톨릭의 그림 기법 발전과 화풍 변화는 그 이후 일이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된 두치오(Duccio)의 이콘. 1315년>

  이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지극히 추상적인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문자는 필수이지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누구나 쉽게 이해시키려면 그림이 효과적이다. 즉, 그림 문자인 말 그대로 상형문자다. , 그림이 글자가 되려면 상호 약속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 규칙이 필요하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더 이상 이콘으로 볼 수 없다. 이콘은 일종의 문자로서, ‘정보전달 혹은스토리 텔링에 촛점을 맞췄기 때문에 누가 그렸어도 같은 형태여야 하며 당연히 화가의 개성은 억제될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문자의 한 형태인 이콘에서 종교적 열정을 넘어 작품 자제의 감흥을 느껴 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의 이콘 모자이크>

  그리고 그림을 입체로 표현하면 조각이다. 초창기 성상 제작은 조각가에게는 신앙심의 표현이자 성직자에게는 포교를 위한 훌륭한 도구였을 것이다. 이 정도라면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르침과 의미 대신 눈에 보이는 형태에 집중한다면, 신의 가르침을 설명하던 도구가 말 그대로 이 된다. 이쯤 되면 말 그대로 우상숭배가 되어 기독교 교리 상 좌시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7세기에 들어 같은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이 등장했고, 교회 분열 당시에는 이미 십자군이 나서야 할 만큼 이슬람 세력이 팽창해 있었다.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배격하기 위해 그림까지 금지한다. 심지어 변형을 막기 위해 문자의 번역까지 금지시킨 덕분에 꾸란은 중세 아랍어의 형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에 이슬람 세력과 직면하고 있던 정교회는 분명한 입장 표명을 강요받았고, 가톨릭보다 더 강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문자인 이콘은 인정하지만 우상인 성상은 인정하지 않는다.

<평면은 그림, 입체는 조각>

  반면 성상을 허용한 가톨릭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동쪽에서는 동로마 제국에, 서쪽에서는 피레네 산맥에 가로막힌 이슬람은 먼 이야기다. 평면이건 입체건 받아들이기에 따라 우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굳이 형태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성화나 성상 자체를 숭배하게 될 가능성은 여전하지만, 만일 성화나 성상이 자체가 아닌, 예술품이라면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문자가 아니라면 더 이상 모든 성화, 성상이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다. 바꿔 말하면 초기에 이콘과 차이가 없던 가톨릭 성화에 예술가의 개성과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공교롭게도 교회 분열(11세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르네상스(14~16세기)의 물결이 서유럽을 휩쓸었다. 어쩌면 성화나 성상을 예술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르네상스와 맞물리면서 서양 예술이 급속도로 발전한게 아닐까? 아니, 어쩌면 작자의 개성을 인정한 것이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 동로마 제국이 멸망(1453)했고 정교회는 예술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혹시 민족혼이 된 정교회에서 변화는 타협으로 여겨지면서 더욱 완고해졌다면, 정교회판 위정척사운동도 여러 차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상을 허용하자 엉뚱한 부작용이 생겼다. 대체 무엇을 그린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느낌대로만 그려내면 작품을 납품할 수 없다. 따라서 더 이상 문자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약속, 즉, 열쇠를 든 사도 베드로 혹은 사도 바울이 칼을 지참하는 등 그림문자의 전통은 여전히 남아있어야 한다. 이는 훗날 도상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한다. 비록 인쇄체가 필기체로 변하기는 했지만 문자로서 최소한의 약속은 여전히 남아있는 셈이다.

<화풍 비교 - 불가리아 릴라 수도원의 성모자와 15세기 라파엘로의 성모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중앙집권적 보편성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아마 가톨릭은 중앙집권을 이룬 덕분에 오히려 보편성의 허용범위와 지침을 명확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만 없다면 유학자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김대건 신부의 초상. 병오박해의 와중에 신앙을 지켜낸다면 복장 쯤은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 반면 정통성을 주장하는 정교회는 신앙을 지켜왔다는 각각의 자부심 만큼이나 정통성의 기준에 대해서도 견해차이를 좁히지 못한다면 오히려 지방분권화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서예>

  그러면 모든 생물 형태 표현까지 금지한 이슬람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흔히 알듯 이슬람 예술이라면 기하학적인 형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알타미라 벽화에서 보듯 인류는 구석기 시대에도 자연 세계 모사를 시도했다. 모사와 표현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슬람권에도 이런 본능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림을 문자화하는 대신 문자를 그림으로 쓰겠다는 역발상. 바로 서예를 이용한 것이다.

  글자를 통해 새와 바람의 형태를 표현한 모습을 보면 ‘요령’은 어디나 통하기 마련인가 싶어 이 또한 무척이나 흥미롭다.

<문자일까, 아니면 그림의 일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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