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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Hungary)

161.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

  어처구니 없는 사건을 나름대로 해결해보고자 동분서주 하던 동안 긍정과 사교의 화신같은 에릭은 그 사이에도 계속 새로운 친구들을 초대했으며 그의 아파트는 매일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전세계의 친구들로 분주했다.

<늘 북적이는 에릭의 아파트>

  그 중 가장 신기한 만남은 Anders Maarleveld다. 장난끼 넘치는 표정의 네덜란드 친구 앤더스는 헝클어진 고수머리에 멋들어진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마치 아인슈타인을 연상시킨다. 에릭은 우연히 부다페스트에 놀러와 혼자 펍에 들린 앤더스를 만나게 되었고 호스텔에 머물 예정이라는 말에 곧장 집으로 초대했다.

<호텔보다 편안한 에릭의 아파트 내부>

  낯 모르는 외국인들을 수없이 초대해 온 에릭을 생각하면 직접 대면한 친구를 초대하는 것은 오히려 더 편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내게는 낯선 이를 집으로 들인다는게 아직도 신기한 일이었다.

<주짓수를 수련하던 멕시코의 Roy Sanchez>

  한 번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손님 모두는 에릭의 아파트 입구 비밀번호와 열쇠를 보관하는 곳을 알고 있으며 제집처럼 사용한다. 하긴 한국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문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손님이 ‘이리오너라’고 부르면 흔쾌히 사랑방을 내 줬다던데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각박해진 마음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를일이다.

<굳게 닫혀있는 다른 아파트>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랬나? 이성격은 에릭의 룸메이트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브라질인의 기질인가? 역시 유학생활을 정리하면서 짧은 여행을 떠났던 루카스는 열차에서 만난 친구를 초대했면서 한국인 Kim이라고 귀띔했다. 오 한국인이라니 어떤 친구일까?

<루카스와 이웃집 할머니>

  얼마 후 초인종이 울렸고 김인영 군을 만나게 되었다. 인영군 역시 매우 쾌활해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루카스도 돌아오고 인영군까지 합세하자 에릭은 예외없이 파티를 기획했다.

  당장 융통할 자금이 생겼기에 조금이나마 에릭에게 보답하려고 동참했으나 역시 에릭은 비용을 받지 않았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온천, 박물관 등 관람을 모조리 포기했음에도 뜻하지 않게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고 있다.

<특대형 피자>

  흔히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 한국에도 오랜 친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내 처지를 알리지도 않았다. 알게 된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은 에릭, 아직도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는 없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시기에 그에게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에릭은 브라질로 돌아간 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 있으며 브라질에도 놀러오라고 재촉한다. 에릭 덕분에 브라질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나와 관계없는 Boscolo 호텔>

  그는 대체 왜 나에게 잘해줬을까? 자전거 여행자가 넘쳐나는 유럽에서 소매치기를 만난 칠칠치 못한 여행자에 대한 호기심은 아닐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궁금함도 아니며 외롭고 쓸쓸해서도 아니다. 그는 이미 한국인을 포함해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단지 동정심의 발로(發露)였다면 머물곳을 제공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으나 그는 내 기분까지 고려해줬다. 이유가 뭐가 되었던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다.

<역시 관계없는 Arcadia 호텔>

  이런 가운데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도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일단은 여권 외 부담없이 휴대할 수 있는 신분증도 필요하다. 마침 집시를 잡기 위해 매일같이 들렀던 WestEnd City Center에 국제학생증(ISIC) 발급처가 있었다. (방송통신대학교) 휴학증명서를 제출하니 즉시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 철봉이 되어버린 오륜 마크>

  앞으로는 물가가 더 비싸진다. 헝가리에서 준비를 갖춰야 한다. 끈 떨어진 샌들도 다시 구입하고 체인이 달린 지갑도 구입했다. 매일같이 손빨래하고 비벼짜다 보니 엉망으로 헤져버린 속옷도 새로 구입했고 비상식량까지 두둑히 챙겼다.

<떠나야 할 시간. Nyugati 역>

  찾을 가능성이 0에 수렴하지만 아직도 남은 미련에 마지막으로 경찰서도 다녀왔다. 더 머물고도 싶지만 이미 왠만한 명소는 둘러봤기에 이제 부다페스트를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인영군과 조깅 한 번 하고서 함께 출발할 예정이다.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 인영군>

  그런데 이번에는 조깅이 발목을 잡핬다. 특전사를 전역한 인영군은 지칠 줄 모르고 달린다. 차마 이제 힘드니 그만하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가볍게 동네 한바퀴 돌아보려던 코스는 결국 14km으로 늘어났다.

  뛰고 나니 땀에 젖은 옷도 빨아야 하고 제법 피곤하다. 결국 하루씩 더 머무르기로 합의했다. 이제는 진짜 마지노선이다. 나와 인영 군 뿐만 아니라 에릭과 루카스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출발 전 인영군과 Wing>

  그리고 8월 8일. 뜨거운 포옹으로 에릭 및 루카스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다시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 했음에도 열흘이나 체류한, 하마터면 최악의 도시로 기억될 뻔한 부다페스트를 떠난다.

<부다페스트의 거리>

  아쉬움이 없다고만은 말할 수 없으나 이 사건이 없었으면 이 고마운 친구들도 큰 의미없이 그저 스쳐가 기억 한켠으로 사라졌을테니 이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기 보다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에릭과 조지, 루카스 등 고마운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부다페스트 역시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루카스(左), 에릭(右)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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