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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Hungary)

162.브람스와 함께 헝가리 달리기

  늦게 출발한데다 부다 지역을 한바퀴 돌다 보니 얼마 달리지 못했다. 복잡한 부다페스트를 벗어나자 날이 저물 기세다. 결국 Herceghalom역 도로 옆에서 하루를 정리했다.(주행거리 39.34km, 누적거리 11,126km)

<헝가리의 마지막 숙소>

  이제 헝가리를 떠날 시간이다. 헝가리 진입당시 계속 비가 내렸는데 떠날려니 날이 이렇게 화창할 수 없다. 도로는 평탄하고 지도를 볼 것도 없이 1번 국도만 따라 달리면 된다. 조금 더운 것 빼고는 달리기에 최상의 조건이다.

<헝가리 1번국도>

  얼마 안가 헝가리에서 달릴 마지막 주인 코마롬-에즈테르곰(Komárom-Esztergom) 주에 진입했다. 어라? 어제는 Herceghalom에 머물렀는데? 혹시 헝가리어의 –om 어미가 ‘마을’이라는 뜻인가?

  설마 에즈테르곰이 동물 ‘곰’을 말하는건 아니겠지? 재미있게도 이 주의 문장(紋章)에는 곰이 등장한다. 진짜로 곰이 많았던 동네일까?

<코마롬-에즈테르곰 진입>

  코마롬-에즈테르곰 주에 들어서자 바로 오르막이 나타난다. 산이 드문 헝가리에서는 높은 곳일지 몰라도 사실 500m 이하로 산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언덕일 뿐이다. 게다가 도로도 잘 발달되어 있어 달리기에 전혀 지장은 없었다.

<산기슭 주택>

  언덕길을 지나자 이 코마롬-에즈테르곰 주의 주도(州都, Capital)인 터터바냐(Tatabánya)가 나타난다. 주도라고 하지만 작은 시골 마을일 뿐이다. 부다페스트를 벗어나면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위용은 사라졌고 계속해서 한적한 농촌 마을의 연속이다. 심지어 농사용 마차까지 돌아다닌다.

<좌회전하는 마차>

  공터에서는 한 청년이 연(鳶)을 날리고 있다. 연을 보는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동안 넋놓고 연날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헝가리연은 조금 특이하다. 가오리연과 닮았지만 양 옆으로 길쭉하고 아랫변이 짧은 찌그러진 마름모꼴이라 마치 새처럼 보인다. 게다가 중심을 잡아 줄 꼬리가 없고 옆날개만 길다. 가만 보니 두 줄로 연을 조종하고 있었다. 오, 연싸움 하면 생명력이 두배이겠는데?

<연줄 두가닥, 헝가리연>

  헝가리 시골 주택의 선명한 벽면 채색은 농촌과 잘 어울린다. 특히 지붕에 얹혀진 기와는 매우 정겹다. 여러모로 기분좋게 달릴 수 있는 길이다. 이따금 주위와 부조화를 이루는 폐건물이 나타나기도 한다. 정면 부조상을 볼 때 공산주의 시절 만든 것 같다.

<헝가리 시골길><공산주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

  터터(Tata)에 들어서자 호수가 나온다. 잔잔한 호숫가 풍경 역시 평온하다. Balaton 호에 머물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호숫가에 한참 머물렀다.

<터터 호수>

  부다페스트의 집시로 인해 헝가리에 아주 안좋은 인상을 갖고 떠날 뻔 했다. 그러나 경찰마저 신경쓰지 않던 집시도 역시 헝가리에 기여한 바는 있다.

  집시들은 헝가리 전통음악을 받아들여 차르다시(Czardas)라는 장르로 발전시켰으며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등의 작곡가들도 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갔다고 한다.

<호숫가의 휴식>

  주행중에는 배터리가 허락하는 한 늘상 음악을 틀어놓고 달린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지는 않지만 상식을 넓히기 위해 MP3 플레이어에 클래식 소품집 세트도 넣어뒀었다. 호숫가에서 쉬던 중 문득 헝가리 음악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각각 3분가량으로 편곡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춤곡, Hungarian Dances) 1, 5, 6번이 들어있었다.

  익히 알고 있던 멜로디는 5번 뿐이다. 또한 값싼 소품집이라 연주자와 지휘자는 알 수도 없다. 그러나 헝가리 무곡을 들으면서 헝가리 평원을 누비는 기분은 짜릿함 그 자체였다. 특히 5번과 6번이 주행과 잘 어울린다.

<드넓은 헝가리 평원>

  브람스는 헝가리 사람은 아니다. 다만 여행중 헝가리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헝가리 무곡을 여러곡 썼다.

  자전거 위에서 헝가리 무곡을 듣고 있자니 브람스가 마자르족의 기상을 표현한게 아닐까 싶다.

<기마민족처럼 마음껏 달려 볼까?>

  웅장한 도입부는 기마전사들이 평원에 집결하는 모습이 연상되며 갑자기 조용해지는 부분에서는 전투 전의 긴장감이 묻어난다.

  그러다 다시 오케스트라가 일제히 ‘쾅’하는 소리를 내면서 전투가 시작되는 듯 하다. 대체 어떤 춤이 여기에 어울릴까? 변화무쌍한 강약과 속도는 춤추기 위해서라기 보다 마자르족의 전투를 묘사한게 맞는 것 같다.

<마자르 전사들이 모인 영웅광장>

  반면 리스트는 진짜 헝가리 출신으로 부다페스트의 오페라하우스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그는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을 작곡했다. 하지만 헝가리 광시곡은 도로위의 무식한 청자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수차례 헝가리 무곡을 반복해 듣다 보니 코마롬(Komárom)이라는 국경마을에 진입했다. 차도와 철도, 자전거길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코마롬 부근><나란한 3개의 길>

  코마롬과 슬로바키아(Slovakia)의 코마르노(Komárno)는 형제도시다. 원래 하나의 도시였으나 도나우(Donau) 강 국경선이 확립되면서 두 도시로 나뉘었다고 한다. 자매 결연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매 도시의 영어 표현도 모른다.

  두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에서 마지막 기념 촬영으로 복잡한 기억의 헝가리에 작별을 고했다.

<도나우강을 배경으로 헝가리와 작별>

  여느 나라처럼 사전 지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태로 들어온 헝가리는 생각보다 매력적인 나라였다. 특히 유럽 한복판(중부유럽)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모르게 동양적인 분위기와 성명, 년/월/일 등 흡사한 표기법, 굴라쉬와 같은 낯설지 않은 음식 등이 흥미로웠으며 영웅광장의 동상에서 마자르족의 기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헝가리 시골마을>

  시골풍경은 더없이 아늑했으며 광활하게 펼쳐진 대평원은 자전거로 돌아보기에 최적이었다. 반면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시골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어디서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당시의 영화가 느껴진다.

<농사짓기도 좋을듯>

  한편, 이러한 헝가리는 과학기술로 두각을 나타낸 나라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이 세계최초의 박격포를 만들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삼중성벽을 무너뜨렸다.(관련글 067.터키의 역사를 엿보다) 에릭이 기계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온 것을 봐도 헝가리의 공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를 위시해 헝가리계 노벨상 수상자들이 10명이 넘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록 노벨상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현대식 컴퓨터의 개념을 확립하고 수학·물리학·컴퓨터공학 등 다방면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저 유명한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도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이다.

<도나우 강변. 천재들의 고향?>

  세르비아의 천재가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였다면 헝가리의 대항마는 노이만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양국의 두 천재는 모두 미국인이 되어버렸다.

  이 외에도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면 한 번쯤 접해 봤을 헝가리안 표기법(int nNumber처럼 변수명 앞에 변수형태를 명시하는 방식) 역시 헝가리 출신 프로그래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폐 선로와 열차>

  다만 많은 학자들이 외국으로 넘어가서 헝가리계임이 잘 안알려졌다. 이는 어쩌면 100년도 안되는 짧은 시기에 이중제국의 성립과 붕괴, 독립-공산화-민주화를 겪은 역사의 부침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코마롬의 한 교회>

  그런데 부다페스트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던 모습이 보였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박스를 깔고 지저분한 담요를 두른 노숙자들이 흔하다. 이러한 광경은 유럽 진입 후 부다페스트가 처음이었으며 그동안 거쳐온 경제사정이 더 안좋은 나라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겉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운 야경. 부다페스트의 에르제벳 다리(Erzsébet híd)>

  이유가 뭘까? 어쩌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후 상대적으로 부유한 헝가리에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먼저 표출된 것일까? 실제로 세계은행(The World Bank - IBRD·IDA)의 시장가격에 따른 국내총생산(GDP)을 보면 헝가리의 GDP는 다른 나라들의 2배가 넘는다.

  비교대상 중 헝가리보다 GDP가 높은 나라는 루마니아 뿐이다. 물가가 비싼 만큼 충분한 사회적인 보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회 양극화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국내총생산 그래프(출처 : 세계은행)>

  노숙자들은 집시로 보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부다페스트 체류 당시에는 그들의 출신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니 북아프리카나 중동 등지의 난민일 가능성도 있다.

<평화롭기만한 들판>

  만일 이들이 외부 출신이라면 발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며 안정되어 있고, 서유럽보다는 물가가 저렴한 곳으로 헝가리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난민(혹은 불법이민자)들이 서유럽으로 가기 위해 헝가리를 거쳐가며 이에 대해 국경을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당시 보이던 노숙자들은 헝가리에 정착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헝가리-슬로바키아 국경>

  그러고 보니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언론인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도 헝가리 출신이었다. 헝가리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퓰리처가 조국으로 몰려드는 난민들의 소식을 접했다면 어떤 기사로 표현했을까?

  또한 향후 거쳐야 할 더 비싼 나라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게 될 지도 궁금하다. 헝가리에 대한 회상과 함께 다음 나라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헝가리 여행을 마무리했다.

<헝가리 여행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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