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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Nepal)

038. 안나푸르나 트레킹 2-ABC에 도착

  3월 12일 아침이 밝았다.

  이날 목표는 2,920m고지에 위치한 히말라야(Himalaya)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는 곳곳에 마을과 숙박업소(Lodge)들이 있어 부담없이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숙박비 또한 저렴하여 150(2,000원 정도)네팔루피밖에 하지 않는다. 단, 이 가격은 음식을 주문할때 제공하는 가격으로 음식값으로 장사한다는 느낌이다. 식비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이 높은 산까지 인력으로 물자를 나른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저렴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발이 계속 저린 것.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시작과 동시에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촘롱(Chhomrong, 2,170m)에서 시누와(Sinuwa, 2,360m)로 가는 길은 대략 M자형으로 중간 계곡은 1,700m이하로 떨어진다.11시 방향의 까마득한 마을에서부터 400m 아래의 계곡을 거쳐 5시의 정자로 다시 올라왔다.

  내리막길은 한 번 더 나오는데, 시누와에서 Kuldhigar(2,540m)를 거쳐 뱀부(Bamboo, 2,310m)로 가는 구간도 1km정도에 200m이상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다. 내리막길 역시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미끄러지는 등 위험요소는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리막길이 훨씬 힘들었다. 상당히 가파른 돌계단이라 등산스틱 대용으로 사용하던 대나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평지나 오르막에서는 상당히 빨리 걷는 편이었으나 내리막에서는 일행들 속도에 맞추기도 벅찼다.

  마침내 도착한 뱀부에서 중식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주문하면 주위의 밭에서 직접 재료를 수확하나보다. 식사준비시간은 거의 한시간가량 걸린다. 나는 중식은 에너지바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다른 일행들이 식사 마치기를 기다리며 장시간의 휴식을 가졌다. 

  그런데 아침부터 느꼈던 손발 저림이 점점 심해진다. 이제는 손 뿐만 아니라 팔꿈치까지 저림 증상이 나타난다. 손 쥐었다 폈다를 반복해도, 체조를 하고 팔굽혀펴기와 물구나무서기를 해봐도 변화는 없다. 맥박은 평소보다 15%정도 빠르게 뛰는 듯 하다. '여기는 2,310m밖에 안되는데 벌써부터 고산병 증상인가?' 보통 3,000m 정도에서 증상이 나타난다는데 답답할 뿐이다.

  고산병 약도 먹고, 혼자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다가 포기하고 주위 사람들과 놀고 있었는데 어느새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출발한다는 것. 허겁지겁 짐을 꾸리고 따라나섰다. 출발한지 5분이나 되었을까? 마침 지도를 탁자에 놓고 온게 생각났다. 바로 돌아가서 가져와도 문제없는 거리였으나, 지도가 없어도 갈 수 있을듯 했다. 뭐 200루피(2,600원)밖에 안하니까 포기해야지.시누와에서 만난 뚱한 표정의 히말라야 소년

  손발저림 현상은 점점 심해졌고, 피가 안통해서인지 상온에서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졌다. 재미있는건 혀도 저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마치 사랑니 뽑을때 마취한 그런 느낌이었다.

  출발 전부터 고산병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에게 나타난건가?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나혼자 내려가야겠다. 마침 나는 포터에게 짐 맡긴것도 없으니 다른 일행들에 짐이 되지는 말아야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뱀부-도반 구간은 평이한 코스였다.그런데 고산병이던 뭐던 여기까지 와서 내려가는건 상당히 억울하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뭘까?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길도 편한데 한 번 뛰어보면 어떨까? 뛰면 혈액순환도 잘 될 거고, 심박수도 높게 올라갔다 떨어지면 더 높은곳에서도 대비가 되지 않을까?' 설령 중간에 하산해야 하더라도 아무것도 안해보고 내려가는것 보다 덜 억울할것 같았다.

  마침, 중식때 목표를 변경한게, 뱀부에서 한시간 반 가량 떨어진 도반(Dobhan, 2,520m)에서 쉬는 것이다.

  '그래, 도반에 도착하면 짐을 내려놓고 뱀부까지 한 번 뛰어보자. 뱀부에 지도도 놓고 왔으니 일행들에게는 지도를 가지러 간다고 하면 걱정하지 않겠지'

  마침내 도반에 도착, 배낭을 내리자 마자 다시 뱀부를 향해 달렸다.

  2,500m에서의 산악구보. 길은 계단도 없고 평이하여 크게 힘들지 않았다. 힘들기로 따지면 유격장에서의 산악구보코스가 훨씬 힘들다. 그런데 숨이 차다. 고지대라 그런가?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차다. 어쨌든 뱀부까지 도착. 20분 가량 소요되었다.

  중간에 뛰는것을 본 외국인 트레커들이 무슨일이냐고 묻는다. 신체적 조건이 우월한 서양인들 앞에서 대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주고 싶었다.

  "I'm training!" 한마디 외치고 이라고 말하고 다시 뛰었다. 등 뒤로 "Wow", "Fighting" 따위의 소리가 들린다.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라 조금 더 힘들었다. 러닝 앱을 이용하여 측정해보니 2.37km 28분이 소요되었다. 1km당 12분이 걸렸으니 평지보다 절반의 속도인 셈이다.러닝앱을 이용하여 측정한 산악구보 코스

  돌아와 보니 중간에 만난 외국인들이 숙소에 있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Just map?라고 한다.

  난 분명히 training 이라고 했거늘. 누가 말한거지?, 내 의도와는 달리 그깟 지도한장이 아까워서 산길을 달린 우스운 녀석이 되어 있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여기부터는 온수샤워 요금을 따로 받는다) 주인몰래 방에서 라면도 끓여먹고 휴식을 취했다.


  3월 13일. 이번 목표는 마차푸차레 베이스 캠프(Machhapuchhre Base Camp; MBC, 3,700m)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nnapurna Base Camp; ABC, 4,130m)위쪽은 등반코스인지 모르겠으나 여기까지는 정말 쉬운 코스다. 고도만 높을 뿐이다. 험하기로 따지면 포항의 454m밖에 안되는 천자봉이나 문무대왕로가 훨씬 험한것 같다.

  다행인건 손도 다시 따뜻해졌고 저림 증상도 많이 사라졌다. 내가 겪은게 고산병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산악구보가 도움이 된건지도 모르겠지만 극복해냈다는 생각에 기분도 좋아졌고 베이스 캠프까지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겨서 정말 흐뭇했다.눈 쌓인 계곡은 왠지 강원도 태백을 연상시킨다

  신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걸었다.
  '막걸리 생각날 때, 시냇물을 마시고, 사랑이 그리울 때, 산속을 헤매인다' 이 좋은 산에서 왜 이런 노래만 생각나는지도 모를일이다. 어쨌든 산속을 헤매로 있으니 나름 어울리기는 하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친구들 생각도 나고,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바라보며, 저기에 안테나를 세우면 트레킹 코스 전체가 통화권에 들어오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만 하면서 걸었다.구름뒤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마차푸차레(6,997m), 일명 Fish Tail

  MBC가 다가오니 해발고도가 높아져서인지 그동안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여학생들은 눈에띄게 컨디션이 안좋아 보였다. 첫날 내가 무리하게 만든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뿐인데 어떻게 도와줄 방법도 없고, 호각이라도 불면서 응원해주려고 했으나 역효과인듯 해서 포기했다.

  남자들은 큰 문제없었다. 특히 나보다 6년 어린 부승군는 아주 날아다닌다. 딱 산악 체질이다. 나도 저때는 저정도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MBC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도착이다. ABC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설레임 때문인지 자정 무렵 잠이 깼다. 밖에 나와보니 밤하늘은 정말 장관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도 멋졌지만, 눈 덮힌 산의 야경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밤하늘과 산악의 형상은 화선지에 먹으로 칠한것 같은 한폭의 수묵화 같았다. 급히 카메라를 가져와 이래저래 찍어봤으나 도무지 그 느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필름대신 가슴에 새길 뿐…….한 폭의 수묵화 같았던 안나푸르나의 야경

  드디어 3월 14일 아침이 밝았다. 이제 목적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로 간다. MBC에서부터는 상당히 추웠기 때문에 방한대책을 강구하여 길을 나섰다. 길은 눈밭이었다.

  눈 사이를 뚫고 간 ABC.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새파란 하늘과 하얀 눈과 구름. 그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안나푸르나Ⅰ봉(8,091m)은 환상적이었다. 그 색감을 카메라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서(오히려 카메라가 더 왜곡시키는 것 같았다.) 차라리 흑백 사진을 낫겠다 싶었다.

  안나푸르나Ⅰ은 수줍어했지만, 남 안나푸르나(Annapurna South, 7,219m)와 Hiun Chuli(6,434m)는 마치 듬직한 호위무사처럼 옆을 지키고 있었고, 트레킹 내내 발걸음을 안내하던 삼각산-마차푸차레(Machhapuchhre)는 어느새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ABC에서 바라보던 마차푸차레구름모자 뒤로 숨어버린 안나푸르나

  올라오면서 이 쯤 통신시설이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ABC 롯지 옆에는 파라볼라 안테나와 태양 집광판이 있었다. 안테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든다.

  공부에 손 뗀지 오래지만 나름 전자공학도였다고, 대학교때 안테나공학 공부하던 생각.

  그러고 보니 입대한지 7년째 되는 날이다. 동기들과 이름모를 산속을 무작정 걷고 걷던 기억. 동기들이나 친구들과 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동(오대산), 서(마니산), 남(한라산) 산악행군을 마치고 다음은 북쪽. 백두산이라고 외치시던 대대장님도, 우리 중대가 다같이 왔어도 재미있었겠다는 생각도…….파라볼라 안테나와 집광판

  ABC 롯지를 뒤로 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추모비가 하나 서 있다.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그대들이여.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 곳에서 산이 되다.'

  바로 안나푸르나에 새 길.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실종된 박영석 대장 등 3명의 추모비였다. 추모비 한켠의 가족사진은 슬픔을 더하게 만들었다.
박영석 대장 추모비

  ABC에서 감동은 잠시 오히려 분노가 솟구쳤다. 손에 잡힐듯한 안나푸르나……. 하지만 나는 올라갈 수 없다. 저 추모비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와서 그냥 내려갈 수 밖에 없다는게 너무 화가났다. 화풀이라도 하듯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안나푸르나는 잡히지 않는다.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의 모습마차푸차레와 Hium Chuli

  내 사진도 몇 장 남겼다. 답답해서 웃통을 벗어제꼈다. 사진은 역시 이빨사진이다.춥지 않냐고 물어보면 그냥 웃지요기념품이라는 말에 군생활 내내 못입었던 방상내피는 안나푸르나에서 제 몫을 했다.

  그리고 출발 5일만에 도착한 ABC를 뒤로 한 채 다시 MBC로 발걸음을 돌렸다.ABC에서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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