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MBC로 내려와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이제 내려가는 길이다.
늘 내리막길이 더 부담이고 긴장된다. 이유는 무릎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젠가 읽었던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라는 소설 때문이다. 사고는 항상 긴장이 풀리면 일어난다.
다행히 복귀길은 수월했다. 아침까지도 힘들어하던 여학생들도 많이 회복된 듯 한 느낌이라 다행이다.우리를 배웅하는 듯한 설산
그런데 데우랄리(Deurali, 3,200m)를 지난지 얼마나 되었을까 뭔가 머리가 따끔거린다. 확인해보니 쌀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우박이 떨어지고 있다.
우의를 꺼내기는 귀찮고 이 지역 기상을 잘 아는 현지인들을 따르기로 했다. 마침 포터 2명 중 한명은 우의를 착용했고 한명은 그냥 걸어간다. 그냥 걸어가는 녀석에게 우의 필요없겠냐 물어보자 비는 안올거라고 대답한다.
'좋아.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하고 그냥 내려갔다. 실수였다. 우박은 점점 커지다가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한다. 결국 옷이 다 젖고 말았다. 포터녀석 괜히 믿었다. 중간 히말라야(Himalaya, 3,170m) 롯지에 혼자 멈추어 판초우의를 착용했다. 아니 할 수 밖에 없었다.
옷이야 말리면 되지만 운동화가 젖은게 문제다. 트레킹화를 빌려올 걸 그랬나? 결국 목표만큼 내려가지도 못하고 올라올 때 쉬었던 도반에서 멈췄다. 일행 중 감기환자가 발생하면 안되는데 걱정이 많다.장작을 쌓아놓은 정겨운 모습
운동화가 젖어 롯지에서 맨발로 다니는데, 올라갈때 도반에서 만나 계속 동행하고 있던 남용 형님이 슬리퍼를 빌려주셨다. 슬리퍼뿐만이 아니다. 자전거 여행이란 말에 흉터가 남지 않는다는 약도 주셨고, 튜브형 볶음 고추장도 주셨다.
물질적 도움도 고마웠지만 여러가지 유용한 충고도 많이 해주셨다. 특히 무리하지 말라는 말씀은 잘 새겨야겠다. 다른 일행들이 쉬는 사이, 남용형님과 함께 락시라는 네팔 술을 곁들여 좋은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이다. 걱정대로 여학생들은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아무래도 전날 비맞은게 문제인것 같다. 그래도 올라올때에 비해 수월하게 내려가고 있다.무작정 내려가기만 하는건 아니다. 계곡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오르막-내리막이 반복이다.
시누와-촘롱 구간, 오르막길에 여학생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힘들어서 많이 뒤쳐졌지만 열심히 따라오고 있다.
아마 한국에서는 평지도 며칠씩 걸은 적이 없었겠지. 아마 내가 짐작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같은 길이라도 체감 난이도는 다를테니. 게다가 감기까지. 그럼에도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모습이 대단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남자들이었다면 그것도 못하냐고 적당히 자극하면서 때로는 신나게 함성도 지르면서 갔겠지만, 도무지 여학생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때 도와준게 재희누나다. 누나는 정말 큰언니답게 잘 다독이면서 동생들을 이끌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늘 내 기준에 못맞추면 할 수 있을때 까지 질책했는데 저런게 진짜 리더십이었구나.
부드럽게 대하면 만만해 보여서 기어오를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본 부드럽게 격려하는 모습은 만만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태산처럼 든든한 모습이었다.저 광주리에는 닭이 들어있다. 닭을 풀어주는 꼬마
남자들은 수월히, 여학생들은 서로 격려해가며 지누단다(Jhinudanda, 1,780m) 롯지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천연 온천이 있다. 단 계곡으로 한참 내려가야 한다. 여학생 둘은 남겨놓고 다른 일행들은 온천에 다녀왔다. 또 트레킹 중간 중간 마주쳤던 성구씨 예비 부부를 다시 만났다.
밤에는 남용 형님 덕분에 스쿠티라는 네팔 육포에 락시를 곁들여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트레킹 마지막 날이다. 처음에는 북극성마냥 길을 인도하던, 하산길에는 듬직하게 등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마차푸차레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설산이 보이던 풍경은 어느새 푸르른 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아무 욕심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채석장의 소년
정말 가슴아픈건 트레커들을 보면 '스위트?' '캔디?' 하면서 다가오는 꼬마들이다. 처음에 꼬마들이 귀여워서 누군가 한개씩 줬겠지? 한번 그 달콤한 맛을 본 꼬마는 외국인만 보면 사탕을 요구한다. 아무 욕심없이 살 것 같은 이들에게, 트레커들이 구걸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먹어도 배부르지도 않은 그깟 사탕을 주고 자존심을 뺏아간 것이다.
꼬마들에게 사탕 몇게 쥐어주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스스로를 괜찮은 놈이라 대견하게 여기며 흐뭇해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가? 아니면 그깟 사탕하나 아까워서 교육적으로 좋지 않니 어쩌니 자기합리화를 하는게 떳떳한 것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안나푸르나에서 그 설산의 눈보다 더 차가운 빈부격차와 가난을 본다.
그들이 질리도록 보는 풍경을 보기 위해, 자기 몸무게의 절반에 해당하는 짐을 지고 하루종일 산을 올라야 받을 수 있는 일당을 세끼 밥값으로 흔쾌히 지불하는 아들뻘의 외국인을 보며, 그들은 우리를 호구로 보고 돈 생겼다고 좋아할까? 아니면 서글픔을 느낄까?묵묵히 산길을 오르는 말? 나귀?
반평생. 그의 젊음과 청춘을 바쳤던 히말라야. 그곳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엄홍길 대장.
트레킹 첫날 본 쉬리 비레탄티 초등학교는 태극기 휘날리는 모습에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지만,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하는 학교는 엄홍길 대장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대한민국. 우리도 6.25사변 이후 세계 최빈국이었다. 미군만 보면 초콜렛 달라고 따라다녔다고 하지 않나? 그 열악함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고 지금의 G20 대한민국을 만든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 세대의 고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이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더 가난한 북녘 땅의 동포들은 무슨죄로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야 할까? 한때 우리보다 더 잘살던 땅에서 전쟁준비와 자신들의 배만 불리면서 전 세계에 식량을 구걸하게 만든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북한 괴뢰정권은? 생각은 한없이 이어지고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진다.동생을 돌보는 저 소년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
조금 걸었나 싶더니 어느새 헤어지는 순간이 다가왔다. 우선 남용형님은 트레킹을 계속하기 위해 란드룩(Landluk)으로 가셨고, 우리는 조금 더 걸어 시와이(Siwai)에서 지프를 타고 포카라로 돌아왔다.
일주일간의 환상적이었던 안나푸르나 트레킹.
그동안 자전거를 타서인지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 중간에 손발 저렸던 것 외에는.
사실 이 코스는 큰 배낭을 세개씩 짊어진 포터들도 다니는 길이고, 산악회에서 단체로 오신 한국 할머니들도 오르내리는 길이다. 산 자체가 험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만 잘 짜면 초보자도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누구에겐 호사지만 누구에겐 삶의 일부인 안나푸르나.
하지만 만약 나 혼자 출발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첫날 촘롱 이상 갔을 것이다. 그리 먼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히말라야도 별 거 없잖아 자만하며 둘째날에 MBC에 도전했다가 고산병으로 중도 하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산병은 몸이 고도에 적응할 시간보다 더 빨리 높은곳에 올라가서 발생하므로. 코스가 쉽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한 코스였다.고산병 따위는 모르는 천진난만한 히말라야 소년.
그런 점에서도 이번 일행들과의 만남은 최고였다. 느린 속도에 맞춘게 오히려 내 몸이 고도에 적응할 기회를 준 것이었고, 이 멤버들이 없었다면 ABC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싶다.
또 형선씨-재희누나 부부의 선한고 인자한 모습과 부드러운 리더십, 서로 아끼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고. 대열이 길어지면 중간에서 속도 조절해주고, 먼저 숙소에 도착하면 뒤에 올 일행들이 바로 쉴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준 듬직한 부승군,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겠지만 스스로 극복해낸 여진양, 미리양.
큰 형님 같았던 멋진 남용형님과의 만남도 좋았고, 예비신부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걷던 성구씨 커플은 부러움을 폭발시켰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문에 이후 일정이 완전히 꼬여버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배낭여행을 하게 되었으나 후회는 없다. 여기 안왔다면 이런 좋은 분들과의 만남도 없었을 테니…….
이제 다 각자의 길로 헤어졌지만, 다 무탈히 여정 마치고 안전히 귀국하시기를 바라며 안나푸르나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을 잠시 접어 둔다.어느새 9명이 된 우리 일행. 지누단다를 떠나기 전 마지막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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