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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30. 사라예보의 총성

  어찌 된 일인지 매일같이 장대비가 쏟아진다. 곧 개겠지 하며 기다려 봐도 비는 도무지 그칠 줄 모른다. 비맞으며 자전거 타는것은 정말 싫어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비가 잠깐 그친 틈을 이용하여 시내에서 13km 가량 이격된 사라예보 땅굴(Sarajevski ratni tunel)로 향했다.

  하지만 절반도 채 못가서 다시 비가 쏟아진다. 판초우의를 뒤집어 써 보지만 축축한건 어쩔 수 없다. 팔과 다리는 비에 젖고 상체는 땀에 젖는다. 판초 위로 느껴지는 빗방울은 매우 차갑다.

<비내리는 사라예보 공항>

  땅굴은 공항 근처라 쉽게 찾을거라 생각했는데 공항 주변은 밭과 민가 뿐이다. 길 안내 역시 부실하여 공항 부근에서 한참 해멜 수 밖에 없었다.

  우여곡절끝에 도착한 땅굴 앞에는 너덜너덜해진 위장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땅굴 입구, 지뢰 경고문>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사라예보 일대는 세르비아계 유고군에 의해 4년간 포위되었다. 공습이 계속되었고, 보급은 차단되었다. 기간 중 11,000여명의 주민이 사망했다. 모든 물자는 물론 식량마저 바닥났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당시 상황도. 사라예보는 완전히 포위되었다.><주민들은 전투식량으로 연명>

  활로는 단 하나. 사라예보 남서쪽에 위치한 공항은 UN의 통제하에 있었고, 공항 뒤편은 자유 보스니아 진영이다. 하지만 협소한 공항 진입로는 유고군의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지날 수가 없었다.

<땅굴 전시관>

  이에 주민들은 포위된 사라예보에서 자유 보스니아 진영까지, 맨손으로 공항을 가로지르는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4개월 4일의 작업 끝에 높이 1.6m, 폭 1m의 약 800m의 땅굴이 완성되었고, 이 땅굴을 이용해 식량, 의약품과 생필품 보급이 시작되었다. 땅굴은 사라예보 주민들의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땅굴이 대부분 파손되었고 20여 미터만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땅굴은 습하고 낮아서 허리조차 펴기 힘들었다.

<땅굴 바닥에는 물자수송용 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당시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었고, 한켠에서는 당시의 참상을 반복 상영하고 있었다.

<탄박스로 만든 객석>

  땅굴 견학을 마치고 주위 건물을 둘러보니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땅굴 때문일까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어쩐지 사라예보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총알 자국이 가득한 사라예보 땅굴 외관>

  다음날은 간만에 날이 개어 편하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나고그(Synagogue)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입장료 없으니 그냥 들어오라고 한다.

  알고보니 이날(5월 17일)은 국제 박물관의 밤(International Museum Night)으로 밤 늦게까지 사라예보의 모든 박물관이 무료로 개방된다고 한다.

<시나고그 내부>

  으으. 땅굴을 오늘 방문했으면 비도 안맞고 무료관람 하는건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급하게 박물관 동선을 짜 본다.

  우선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B&H)으로 향했으나 리모델링 관계로 휴관, 바로 옆의 역사박물관(Historical Museuum of B&H)를 보기로 했다.

<소총, 무전기, 보이스카웃 마크가 부착된 전투복>

  이름은 역사 박물관이었지만 전시물은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것 뿐이었다. 당시의 사진, 무기, 생활상 등이 주 품목이며, 관련 그림 또한 여러 점 걸려있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사진전><폐허가 된 건물과 UN소속 차륜장갑차><야외 전시관의 박격포와 중기관총>

  역사박물관 한켠에서는 세계의 하루라는 주제로 간이 공연과 세계인의 일상 생활 사진이 전시되어있다.

  내용이 조금 뜬금없기는 하지만 다시 보니 '전 세계는 이렇게 평온한데 왜 우리만 격렬히 싸웠는가?' 하는 항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계의 하루 공연><댄스 공연>

  남은 시간, 무거운 마음으로 향한 마지막 행선지는 1878-1918 사라예보 박물관. 사라예보 사건 현장에 세워진 박물관이다.

<사라예보 외곽. Hell come>

  박물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 따라 세르비아가 독립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BiH를 점령했다. 발칸 반도를 지배하던 오스만(Osman) 제국은 이미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때 일부 세력은 이중제국의 BiH 합병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세르비아계 비밀 결사조직이었던 '검은손'이었다.

<당시 사라예보 거리 묘사>

  1914년 6월 28일. 이중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 Franz Ferdinand)은 군 사열을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이때를 노려 검은손 단원들은 대공 암살 계획을 세운다.

<사라예보에 도착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

  대공 부처는 Miljacka 강변로를 따라 시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 안으로 폭탄이 날아들었다. 대공은 침착히 폭탄을 주워 밖으로 던졌지만, 뒤를 따르던 수행원 등 여러 명이 중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나 대공은 무사히 시청을 방문하고 이로서 사건은 종결되는 듯 했다.

<대공을 접견했던 시청>

  대공은 남은 군 사열 일정을 취소하고 부상자들을 위문하기로 한다. 그러나 운전사는 바뀐 계획을 알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었다. 대공의 차가 라틴 브릿지 앞에서 우회전 한 직후, 총성이 울리고 곧 대공 부처가 쓰러졌다.

  암살범은 불과 19살의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라는 청년이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동조자들, 암살에 사용된 권총>

  혹시 이 사건 때문일까? 현재 이 길은 시청 방향으로 일방통행이다. 더 이상 대공이 암살당한 방향으로 주행할 수 없다.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Miljacka 강변 주택>

  그리고 암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이중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처음에는 이중제국과 세르비아의 갈등이었지만, 이중제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제국, 발칸반도의 통제력을 상실한 오스만 제국, 역시 발칸반도에서 영토분쟁 중인 신생 독립국 불가리아 왕국이 힘을 합쳤다.

  세르비아 편에는 같은 슬라브족이며 남하정책을 펼치던 러시아, 독일제국의 확장을 경계하던 프랑스, 끊임없이 대륙 진출을 꾀하던 영국, 그리고 인근 유럽 국가는 물론 영연방 국가와 미국, 일본까지 참전하여 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경술년(1910) 이중제국 지도와 사라예보 시 문장>

  암살을 실행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이 사건이 세계대전의 불씨가 될 것은 생각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저격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심지어 프란츠 요세프 황제와 대립하며 소수민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다. 이중제국의 복잡한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계의 기득권을 포기하며 연합정부 형태를 구상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전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지만 세르비아에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전쟁 중 30% 가량의 세르비아 주민이 희생되었다.

<성당 뒤에도 총탄 흔적이 가득하다>

  한편 BiH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세르비아에 속하는가 했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애당초 느슨한 연방이므로 이중제국 치하와 큰 차이도 없었으며, 민족갈등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민족문제는 다시 보스니아 내전을 일으켰고, 지금도 사라예보 사건 전과 마찬가지로 세르비아는 BiH를 통치하지 못한다.<보스니아 내전의 참상 묘사>

  가브릴로 프린치프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야 할까?

  세계 대전을 불러일으킨 원흉인가? 아니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민족주의자 또는 독립운동가인가?

  그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박물관에서는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고 있다. 단지 사실만을 담담하게 기술 할 뿐이다. BiH라는 나라로 묶여 있지만, 구성민족의 입장이 첨예한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우측 흰색 검정색, 산의 25%가 묘지>

  2014년은 사라예보 사건과 1차대전이 일어난 100주년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일단. 발칸반도에 더 이상 포성은 들리지 않는다.

  얼핏 보면 동서양을 포용하고 있는 듯 한 사라예보.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니 포용이 아니었다. 한 나라이지만 종교와 민족에 따라 보이지 않는 장벽이 들어서 있었다.

  좁은 사라예보 외곽의 산에는 수많은 묘비가 보인다. 묘비는 종교와 민족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같은 국적을 갖고, 같은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결코 동화되지 못한다.

<구획이 철저히 나눠진 무슬림과 가톨릭 묘지>

  복잡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데 길가의 펍 있던 무리가 들어오라고 한다. 그들은 맥주를 두 병이나 사 주었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허리춤에 숨겨 둔 권총을 보여준다.

  '이건 뭐야? 장난감이겠지? 설마 시내 한복판에서 총부림을 하겠어?'

  조금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총을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탄창을 빼고 건네준 묵직한 권총. 놀랍게도 진짜 마카로프(Makarov) 권총이었고, 탄창에는 실탄이 가득 차 있었다.

  왜 총을 갖고 다니냐고 물어보니 웃으며 자기는 갱이고 여기서 만났으니 우리는 친구지만, 만약 길에서 만났으면 나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철모, 방독면, 단도 등 각종 군수품이 돌아다니는 시장>

  이어지는 말은 권총 소지는 불법이지만 마음먹으면 구할 수 있으며, 호신용으로 차고 다닌다고 한다. 그는 나보다 훨씬 체격도 좋았고 팔도 굵었다. 대체 왜 호신용 총이 필요한지 물어보니 갑자기 표정이 바뀐다.

  "너는 말해도 우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더 질문하지 마라. 만나서 반가웠다. 이제 돌아가는게 좋을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럽게 웃고 어울렸는데 어느새 위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다.(Tip. 저는 무사했지만, 늦은시간 Branilaca Sarajeva 거리 일대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자칭 '갱'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래, 나는 이들이 총을 갖고 다녀야만 하는 이유를 결코 알 수 없겠지….'

  사라예보 사건 100주년. 하지만 발칸의 진정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것 같다.

<평화를 염원하는 불꽃 - Eternal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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