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28. 사라예보! 산(山)Ra예보?

  자리에 누웠는데 밖이 소란스러운데 사람 같지는 않다. '뭐야? 진짜 귀신이라도 나타났나? 지가 귀신이면 귀신이지 왜 내 잠을 방해하는거야?'

  밖을 확인해 보니 여러마리 말이 풀을 뜯고 있다. 가만 보니 말에는 고삐도 없다. 누가 키우는 말이라면 밤에 저렇게 풀어놓지는 않을텐데……. 그럼 야생마 가족? 그런데 말이 야행성이었나? 왜 밤에 돌아다니지?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말떼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 다시 잠을 청한다. 다른데로 간건지 신기하게도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았다.

<이름모를 보라색 꽃. 제비꽃?>

  다음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말은 온데간데 없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흠. 말귀신이었나? 아무렴 어때? 나는 내 갈길을 가야지.

  전날 마지막에 오르막을 오른 덕분에 시작부터 수월한 내리막이다. 날씨도 좋아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길이다.

<편안한 내리막 오솔길>

  한참 달려 내리막이 끝나는 부분에서 다시 마을이 시작되었다. 앞길이 어떨 지 모르니 물부터 챙기자. 여기는 Foča라는 곳이다. 포차? 포장마차라도 있나?

<포차 부근, 텃밭을 가꾸시는 할아버지><낡은 집>

  포차에서 빵으로 중식을 해결하고 다시 출발. 오늘 목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 그동안 북상했으나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울타리 넘어나온 소><길가에 종종 보이는 지푸라기 탑은 여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1,175 고지를 넘어야 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길은 수월하지 않았다. 이거, 사라예보는 산길 주행(riding) 알림이라는 뜻의 산(山)라예보 잖아?

<강바닥까지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라고?>

  게다가 사라예보는 허무하게도 해발 550m밖에 안된다. 산은 그저 넘어가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 가끔 터널이 있기는 하지만, 사라예보까지 산 전체를 뚫은 터널이 아닌 이상, 결국은 내 힘으로 올라가야한다.

<바위사이로 낸 터널>

  그래도 주변 경치가 좋아서 기분좋게 달릴 수 있었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어떻게 참혹한 보스니아 내전을 떠올릴 수 있을까? 하지만 총알구멍이 숭숭 뚫린 표지판은 여기가 전쟁의 땅이었음을 다시 상기시킨다.

<총알 자국이 선명한 표지판>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 수 있을까?

  주위 경치를 보며 즐겁게 달리는 것도 잠시 뿐 끊임없는 오르막에 지친다. 아침에 맑은 하늘을 보며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워서 다시 불평이다. 티셔츠는 땀에 푹 젖은지 오래다.

<신기하게 생긴 바위>

  지친건 나 뿐만이 아니다. 버스도 기진맥진했는지 퍼져버렸다. 언제 이 오르막은 끝날까?

<버스 정비 중. 무슨 문제일까?>

  괜시리 어젯 밤 엉터리 귀신 생각이 난다. 통일신라의 비형은 귀신을 시켜 하룻밤새 다리를 놓았다는데, 어디 산 좀 깎아낼 귀신은 없나? 아니지, 말귀신을 잡아서 자전거를 끌게 했어야 하는건데…….

<아니면 터널이라도? 터널뒤에 또 터널>

  멍청한 생각만 하면서 달리는데 멀리 도로위에 고무조각 같은게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뱀. 덩치가 작고 머리가 세모난게 아마 독사일 것이다. 지뢰에 뱀에, 정말 BiH는 아무데서나 야영하기도 힘들구나.

  그런데 이녀석이 혀를 낼름거리는게 마음에 안든다.

<메롱? 어쭈 약올리냐?>

  "힘든데 약올리냐? 너 이리 와. 뱀 구이로 단백질이나 보충해야겠다."

  등산스틱을 들고 쫒아가자 녀석은 흐물흐물대며 달아나는데 발도 없는 녀석이 무지 빠르다. 그리고 끝까지 메롱을 잊지 않는다.

  "어라? 저 자식이?". 

  빠른 속도로 달아나다가 달려오는 차를 보더니, 이녀석은 몸을 90도로 꺾으며 아슬아슬하게 피해간다. '대체 뭐 저런게 다있어? 뱀은 뉴턴 제1법칙도 안통하는가?'

  멍청하게 뱀을 쫒아가다가 괜히 힘만 뺐다. 그냥 가자.

<괜히 뱀때문에 더운데 힘만 뺐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 힘들다.

<힘들어도 하늘아래 뫼일뿐>

  얼마 후, 약수터가 나타난다. 근처에는 정자도 있네? 세수도 하고 좀 쉬었다 가야겠다.

  자전거를 세우다 보니 핸들바 가방에 이상한 곤충 한마리가 붙어있다.

  'Wing이 무거워진 이유가 너 때문이었구나! 저리 안가?'

<넌 뭔데 무임승차냐?>

  잠시 쉬다 보니 전세버스 한 대가 선다. 그리고 유니폼 바지를 입은 한 무리가 우르르 내린다. 물어보니 포차의 축구팀 선수들로 경기를 위해 사라예보에 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래? 나도 포차에서 왔는데, 사라예보 가는 길이고"

  혹시 이 중에 유명 선수가 있을지 사인이라도 받아두어야 하나? 그런데 너무 많아서 기념촬영만 하고, 행운을 빌며 헤어졌다. 다시 혼자구나.

<포차 축구선수단과 함께>

  끝없는 오르막을 오르려니 괜시리 약이 오른다.

  '이게 다 그 뱀 때문이야. 그 녀석 쫒아가다가 힘 낭비를 많이 했어.'

  괜히 배도 고프네. 그러고 보니 고기를 마지막으로 먹은게 언제더라? 맨날 빵조가리만 뜯고…… 고기. 고기. 으 사라예보에 가면 고기를 먹고 말리라.

<물로 배를 채워야 하다니>

  지쳐 있던 차, 길가에 탁자가 보여서 다시 쉬어가기로 했다.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데 차 한대가 오더니 누군가 내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식사를 권한다. 메뉴는 큰 빵과 구운 통닭. 오오.

  예의상 한 번 거절했으나 재차 권하기에 못이기는 척 반토막을 받아들고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이게 얼마만에 보는 닭고기냐? 알바니아 이후에 처음이구나.

  이 친구는 Todo Pidžula로 사라예보와 트레비녜를 오가며 사업을 한다고 한다. 주로 점심은 길에서 먹으며 닭과 빵은 사라예보에서 사 온 것이다. 통닭 한마리는 너무 많은데 반씩은 안팔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데. 음. 진짜인지 부담없이 먹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것 까지 신경쓸 수는 없다.

<통닭을 제공한 고마운 토도>

  잠시 이야기 하다 헤어지는데 멋진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너 통닭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사라예보에 가면 구운 닭이 5마르크(약 3,500원)정도야. 그리고 5km 정도만 가면 내리막길이야."

  단 5km?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리다. 매일 사라예보에 다니는 운전자가 알려주는 거리정보니까 믿을수 있겠지.

  '좋은 정보, 그리고 맛있는 식사도 정말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얼마 안남았다는 오르막도 더 이상 힘들지 않다. 와, 이거 어제는 물, 오늘은 고기. 생각만 하면 뚝딱 나타나잖아? 다음에는 뭘 생각할까? 음. 음. 떠오르는게 없네…….

<얼마 안남았다. 힘내자>

  그나저나 보스니아 아니, 스릅스카(Srpska Republic) 사람들 정말 친절하다.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달리니 어느새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의 폐가 한 채>

  정상에는 왠지 부비트랩(Booby trap)이 설치되어 있을 듯한 폐가 한채가 서 있었다. 기념촬영을 부탁한 후 이제 신나는 내리막길.

<정상에서 사진 한 컷>

  고개를 넘어서자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치는 풍경><마을이다~>

  어라? 마을에는 세르비아에서 흔치 않은 모스크(Mosque)도 있네?

<스릅스카 공화국에도 모스크가?>

  나란히 걸린 깃발 세개도 눈에 띈다. 별이 그려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기, 문장없는 삼색기는 스릅스카 공화국 기, 마지막은 뭘까? 이 도시의 문장인가?

<세 개의 깃발은 복잡한 나라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Trnovo를 지나자 드디어 사라예보 주(Canton)에 진입. 깡통? 이 나라는 무슨 이름이 다 이래? 개코, 포차에 깡통까지.

  여기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i Hercegovina)의 영토.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왔다갔다 한게 아니라, 꼬리처럼 튀어나온 연방의 경계선이 도로를 7km가량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온거 아닌가? 분위기가 왜 이렇지?>

  그런데 특이한건 수도 근처인데도 전혀 도시같지 않다. 보통 대도시는 진입 전부터 도시 느낌이 나고 교통이 복잡해지는데 여기는 작은 시골마을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은 스릅스카 공화국의 영토다. 개발 여력이 미치지 않은걸까? 어쩌면 혹시 스릅스카 공화국에서는 사라예보가 BiH와 연방의 수도임이 싫어서 의도적으로 개발하지 않는건가?

<설마 여기가 수도, 사라예보?>

  하지만 중요한건 따로 있다. 근처 주유소에서 Wi-fi 신호를 잡아 저렴한 호스텔 정보를 확인했다. 음. 공항을 끼고있는 큰 길 따라 가면 10km 정도. 지름길인 샛길로 질러 가면 8km? 샛길로 가야지.

  아. 이게 큰 실수였다. 샛길은 다시 산으로 이어진다. 이번 산은 주택가다. 음. 사라예보의 달동네인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지나온 도로에 비해 경사가 매우 심해 결과적으로 가장 힘든 코스였다.

<으으으 괜히 이길로 왔잖아.>

  이거, 다 와서 다시 땀빼네. 영차 영차 힘내자. 산을 넘자 다시 가파른 내리막. 드디어 사라예보 시내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Tito 46 Hostel. 가격도 저렴한데다 위치도 시내 중심에 있어서 좋다. 이름도 전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의 지도자 Tito! 그런데 왜 46일까? 46년생은 아닐텐데. 티토가 46년에 집권했나? 아니면 46년에 이곳에 들렀을까?

  호스텔에 들어서자마자 멍청한 질문부터 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주소가 Maršala Tita 46번지이기 때문이다. Maršala Tita는 영어로 Marshal Tito! 티토 원수라는 뜻이다.

  허무한 답변을 뒤로하고, 일단 샤워부터 하자~(5월 10일 주행거리 91.93km, 누적거리 9,170km)

  다음글 ☞ 129. 이상한 도시 사라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