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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29. 이상한 도시 사라예보

  사라예보(Sarajevo)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i Hercegovina;BiH)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i Hercegovina)의 수도이다. 내가 사라예보에 대해 아는건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과, 이에리사 선수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곳이라는것 뿐이다. 사실 이전에는 사라예보가 BiH라는 나라의 수도인 줄도 몰랐다.

<사라예보 중심 Maršala Tita 거리>

  그런데 막상 사라예보에 도착하니 어딘가 이상하다. 그동안 경험한 여러 나라의 수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 찬찬히 분석해 보았다.

  사라예보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선 지형 때문이다.

  Miljacka 강변에 형성된 사라예보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수도라기에는 매우 좁다. 동서로 길고, 남북은 좁은 구조로, 도시 어디서나 산을 볼 수 있다.

<사라예보 중심가에서 본 남쪽은 산지>

  특히 사라예보를 둘러 싼 산지는 영락없는 시골이며, 도시라고 부를 만한 곳은 남북으로는 채 1km도 되지 않는다. 도시 중심에서 뒤(남쪽)를 돌아보면 시골, 주위는 도시, 그 앞(북쪽)에는 다시 산이 보이는 묘한 지형이다.

  반면 이런 지형 덕분인지 1984년에는 동계올림픽을 개최했었다고 한다.

<북쪽도 오르막>

  두번째는 일방통행길이다.

  좁은 골목길이야 일방통행이야 흔하지만 여기는 조금 다르다. 시내 중심 도로인 Maršala Tita 도로는 최대 5차선인데 서쪽 일방이며, Miljacka 강변의 Obala Kulina Bana 도로는 동쪽으로 일방통행이다. 생각없이 자전거를 몰다가는 역주행하기 십상이다.

<사라예보는 일방통행>

  마지막으로 수많은 공동묘지이다.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 중턱에 수많은 비석이 보이고, 전날 사라예보에 진입하면서도 많은 무덤을 봤다. 게다가 공동묘지가 주택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더욱 낯선 느낌을 준다.

<마을 주변의 공동묘지>

  새롭고 특이한 도시 사라예보. 큰 기대를 품고 탐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Miljacka강을 따라 걸었다. 푸른 강을 기대했으나 실망스럽게도 Miljacka강폭은 매우 좁았고 흙탕물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 내린 비의 영향인가보다.

<누런 흙탕물이 흐르던 Miljacka 강>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라틴 브릿지(Latinska Ćuprija).

  이 다리가 유명한 이유는 저 유명한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1914년,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이 다리 앞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 부처를 저격함으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역사의 현장 라틴 브릿지의 야경>

  사건의 현장은 현재 사라예보 1878-1918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보수 중이었다.

<비계로 둘러싸인 건물 앞이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

  라틴 브릿지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시청(Gradska Vijećnica)을 끝으로 도시다운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에 너무 소박한 Miljacka 강가>

  시청 남쪽은 매우 가파른 경사를 가진 마을로, 조금 더 올라가자 수많은 묘비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의 마을길>

  그런데 대체 집 근처에 무슨 무덤이 이렇게 많은걸까? 새하얀 대리석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부분 1990년대 후반에 돌아가신 분들이다. 아마 보스니아 내전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다시 내려와서 시청을 돌아서니 오스만 제국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 시가지가 이어진다.

<강변에 자리잡은 시청 청사>

  근처 국가의 구 시가지는 보통 Stari Grad라고 부르지만 이곳은 Baščaršija라고 한다. 또 Stari Grad는 대부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곳은 성벽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긴, 여기는 성벽이 필요없는 곳이다. 바로 앞, 도시를 둘러싼 산이 천연 방호선 역할을 할 테니까…….

<비둘기 광장으로 불리는 Sebilji><광장 남쪽 거리>

  이 근처에는 Sebilj(일명 비둘기 광장), Gazi Husrev-begova džamija(Ghazi Husrev-bey's mosque)와 구리 세공업자들의 거리였던 Kazandžiluk 등이 이어지고 현재는 대부분 까페와 레스토랑, 환전소, 기념품 상점, 호스텔 등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구리 세공사들의 거리 Kazandžiluk><옛 건물을 활용한 기념품 상점>

  구 시가지는 대부분 16세기 이후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는 헝가리는 물론 오스트리아 비인까지 공격하던 오스만(Osman) 제국의 최 전성기로 문화적으로도 활짝 꽃피었던 시기이다.

<비둘기 광장 북쪽. 칼로 자른듯한 건물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거쳐 온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대부분 한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흔적은 성벽이나 모스크(Mosque) 외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등 정교회(Orthodox) 국가들은 새로 성당을 지었고, 알바니아는 무슬림이 강세지만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통치를 거치며 대부분 유실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발상지였던 터키 역시 정교분리를 선언했고, 웅장한 석조 모스크는 남아있지만 전통 가옥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16세기 지어진 Gaza Husrev-begova džamija>

  그런데 이곳 사라예보만은 달랐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서진하던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모습이 엉뚱하게도 사라예보의 Baščaršija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까페 한켠에서 물담배를 즐기는 어르신>

  히잡으로 머리를 가린 여성들. 방석을 깔고 앉아서 진한 터키식 커피와 차, 물담배를 즐기는 사람들. 곳곳에서 보이는 카펫. 벽돌을 차곡차곡 쌓고 단아하게 기와를 올린 건물 등은 시간을 거슬러 오스만 제국으로 돌아온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기와가 인상적인 Baščaršija 거리><세련된 무슬림 아가씨들>

  특히 폐허로 남은 Tašlihan은 과거의 느낌을 더욱 살려주는 것 같다.(Han은 오스만 시대 행상들을 수용하던 숙소로 19세기까지 사라예보에 5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 Tašlihan은 1879년 불타 폐허로 변했다.)

<상인들의 여관 Tašlihan>

  주택가까지 무덤이 줄줄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전쟁을 겪어 온 사라예보에 예전 거리 모습이 이렇게 남아있는것도 신기한 일이다.

<터키의 바자르에 온게 아닐까 착각하게되는 상점><익살스러운 포즈의 아저씨>

  그런데 사라예보의 더 흥미로운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Ferhadija 거리다. 거리를 따라 오스만 제국의 정취를 느끼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무대가 바뀌어버렸다. 무려 300년을 뛰어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식 거리가 나타난다.

<선 하나를 사이로 달라진 동쪽과 서쪽>

  모스크의 첨탑은 가톨릭(Catholic) 성당의 십자가로 바뀌었고, 기와집은 웅장한 석조주택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백가몬(Backgammon) 게임을 즐기는 대신 체스를 두고 있다.

  이 300년의 시간 차이는 마치 칼로 자른 듯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마침 바닥에 선이 그어져 있으며 Sarajevo meeting of cultures라고 씌여 있었다.

<동-서, 3세기를 가로지르는 발걸음>

  일부러 이렇게 설계하기도 힘들텐데 단지 우연의 일치인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기 그지 없다.

<광장 한켠에서 체스. 마(馬) 나간다><난 말이 아니라 기사(knight)라고>

  이 거리, 아니 선 하나만으로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대립했던 역사가 그대로 느껴진다. 이런 동서양 문명 만남의 현장. 아니 충돌의 땅이 평화로웠다면 그것도 놀라운 일일 것이다.

<가톨릭 Cathedral의 등장>

  하지만 지금 내 관심사는 전쟁이 아니다. 야외 박물관마냥 전혀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거리가 흥미로울 뿐이다.

  조금은 이상하고 낯선 사라예보를 구석구석 누비면서 새로운 나라를 알아가고 있다.

<사라예보 Sebilj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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