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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52. 자그레브의 양치기 소년

  예상외로 자그레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출발하려 하면 한국 대표팀 축구경기가 있거나 다른 친구들이 발목을 잡는다. 정확히 말하면 다 핑계다.

  체류기간이 긴 만큼 LYC의 주인 마르코는 물론 그의 아들 디노와 딸 안나마리아와도 친해졌다. 아이스하키와 컬링이 취미인 디노는 매우 유쾌한 친구였고 디노를 통해 동네 친구들도 알게되었다.

<마르코와 안나마리아>

  하교 후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 안나마리아는 매우 예쁜데다 첫인상이 새침해 보여 말붙이기가 어려웠는데 알고보니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함께 방학기간에 일하고 있는 안나마리아의 친구 루치아는 성격이 매우 밝아서 더욱 쉽게 친해졌다.

  루치아 하면 떠오르는건 매운음식이다. 파스타로 ‘수제비’ 끓이는걸 흥미롭게 바라보길래 조금 줬더니 괴로워한다. 정말 ‘안매운’ 파프리카 가루를 조금 넣었을 뿐이다. 이후 동태국 등을 끓이며 “산타루치아, 배고파?”라고 물어보면 빨간 색만 보고도 기겁한다. 단, 하얀 ‘라이스티’(숭늉)는 잘 마셨다.

<매운 음식을 못먹는 알바생 루치아>

  프랑스, 루마니아, 벨기에 등지에서 온 손님으로 LYC는 늘 북적였다. 브라질 자전거 여행자도 들렀는데 종일 밖에 있어서 떠나는 날에 겨우 인사만 할 수 있었다. 짧은기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미국인 토퍼와 벨기에 친구들>

  반면 계획 이상으로 머물고 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한달째 이곳에 머물고 있는 Topher도 이런 경우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인 토퍼는 중국 등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7년째 외국생활 중이다.

  자그레브를 다음 체코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레 계획이 바뀌면서 귀국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퍼와 함께>

  미국인을 만난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영어로 대화했지만 정작 미국인을 만나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익숙해진 인도식·유럽식 발음과 다르고 말도 빨라서 도무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화가 안되니 유독 토퍼와는 서먹서먹했다. 아침마다 인사만 나누는 정도다.

  토퍼와는 중 축구경기를 보면서 친해졌다. 조금 친해지니까 신기하게도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 친구는 양손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들고 구부렸다 펴는 동작을 자주 한다. 몇차례 같은 손짓을 보게되니 궁금증이 생겨 뜻을 물어봤다.

  이는 ‘Air Quotes’ 또는 ‘Air Quotations Mark’라고 하며 주로 강조, 인용, 풍자를 표현하려고 사용한다고 한다. Quotes(따옴표)라는 말 그대로 따옴표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에서만 사용하는 제스추어인 듯.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인들로부터는 접해보지 못한 표현이다. 그래도 제법 유용해서 토퍼에게는 종종 사용하게 되었다.

<우쿨렐레 선생님 토퍼>

  무엇보다 인상적인건 토퍼의 우쿨렐레였다. 밤마다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이따금 길거리 공연을 통해 여행자금을 보충하기도 한다. 작고 가벼워 들고다니는데 부담도 없어보였다. 관심을 보였더니 흔쾌히 가르쳐준단다.

  그동안 악기를 다루고 싶었으나 기회도 안닿았고 재능도 없었다. 수년 전 통기타를 잡았으나 끝내 F코드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우쿨렐레도 잘 치는건 쉽지 않겠지만 금세 흉내는 낼 수 있게 되었다.

  다음날 바로 악기점을 찾아 200쿠나에 입문용 장비를 구입했다. 막상 실물을 보니 더 좋아보이는 악기가 많았으나 잘 치게 되면 그때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베짱이 생활 중>

  이후 저녁마다 축구경기에 우쿨렐레 합주가 이어졌다. 사실 나는 불협화음만 만들어냈지만 다행히 주위에서 제재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장난감을 들고 신선 놀음을 하느라 도끼자루, 아니 자전거 Wing이 썩어가고 있었다.

<우쿨렐레 선생님 토퍼. 불협화음 넣는건 나>

  하루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자칭 ‘뮤지션’이라는 스페인 친구가 합세했다. 우쿨렐레를 만지작거리더니 자작곡이라면서 괴이한 곡을 들려줬다. 영상을 보고 직접 평가해주시길.

<스페인 뮤지션의 자작곡>

  LYC에는 외국인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인도 있었다. 알라딘이라는 친구는 학업 때문에 자그레브에 온 경우다. 처음에는 나에게 양말, 혁대 따위를 팔려고 하길래 ‘잡상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학비 보조를 위한 아르바이트였고 괜찮은 친구였다.

  나이는 17세. 키가 나와 비슷하니 크로아티아인 치고는 작은편이다. 이 친구와는 주로 함께 운동하러 다녔다. 턱걸이, 팔굽혀펴기는 잘했으나 지구력은 엉망이다. 구령을 넣고 ‘You can do it’, ‘Just 1 km left’ 따위를 외치다 보니 졸지에 구보 인솔자가 되어버렸다.

<프랑스의 까미유, 니나, 로빈, 뱅상>

  하루는 주짓수를 수련한 프랑스 친구가 왔길래 토퍼, 디노, 알라딘 등과 기술을 배우며 놀던 중 알라딘 얼굴에 찰과상을 입혔다. 삐쳤는지 연고를 줘도 안바른다. 흉터가 남을까 걱정했는데 며칠 내 가라앉았고 상처가 아물면서 기분도 아물었다. 다행이긴 하지만 지금도 미안한 부분이다.

<터프한 친구 브라네와>

  동네 주민들도 매우 밝고 적극적이었다. 매일같이 식빵을 사러 들리던 작은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항상 미소와 함께 ‘도브르단(Dobre dan·좋은 날이에요)’을 외친다. 아주머니의 인사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 하루만 안들러도 무슨일 있었냐며 걱정하는 아주머니 때문에 식량이 남아있어도 인사하러 들렀다.

<늘 상냥한 보스니아 출신 미르카>

  디노의 친구 아니카, 안테, 루카, 미르카, 브라네 등도 쾌활하기 그지 없었다. 여기에다가 휴가차 들린 네덜란드 육군소위 ‘레몬’까지 가세하며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미르카와 속 깊은 안테>

  하루는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말 나온김에 Korean Style BBQ 파티를 하기로 했다. 50쿠나씩 걷어 쌀, 삼겹살, 상추, 숯 등을 구입했다. 졸지에 ‘코리안 셰프’가 되어버린 대신 남은 100쿠나가 돌아왔다.

<삼겹살이 익어가고>

  많은 친구들이 모였고 숯불위에 고기가 익어간다. 처음에는 밥과 고기를 상추에 싸먹는 걸 낯설어 하던 친구들은 금새 적응했고 상추가 고기보다 먼저 고갈되었다. 상추 좀 더 살걸 그랬다.

  다만 삼겹살을 나이프로 자르는 모습은 상당히 낯설다. 한국에서는 고기를 가위로 자른다는 말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240쿠나(약 48,000원)으로 8명이 넉넉하게 먹었다. 레몬은 네덜란드에서 이렇게 먹으려면 100유로는 들어야 한다면서 흐뭇해한다. 사실 크로아티아 고기가 싼 것도 있지만 처음 먹는 상추쌈 덕분에 밥으로 배를 채워놓고도 모른다. 오호, 크로아티아에서 삼겹살 사업해도 괜찮겠는데?

<사업 구상이나 해 볼까?>

  삼겹살 파티와 함께 잊지못할 즐거운 기억. 이동네 사람들이 한국인과 정서가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함께 어울리니 더욱 확실하다. 폭탄주를 마시기도 하고 팔씨름도 한다.

<팔씨름 한 판>

  한 친구가 먼저 잠들면 몰려가서 몸에 낙서한다. 어릴 때 MT가서 하던건데 여기서 볼 줄이야.

<머리스타일이 같은 브라네><먼저 잠들면 이렇게...>

  그러다 보니 아예 크로아티아로 귀화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취업이 힘들면 LYC 한켠에서 ‘코리안 식당’을 내라면서 앞다투어 귀화 보증을 서겠다고 나선다. 그동안 친해진 친구들은 많았지만 귀화하라는 말은 처음이다. 아마 목에 걸린 톰슨(Thompson)의 ‘행운의 메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눈물겹도록 고맙지만 그저 마음만 받기로 했다.

<장난끼 많은 아니카>

  그러다 보니 무비자 체류 기간이 끝나가는데 도무지 떠날 수가 없었다. 작별 인사를 하면 밤에 몰려와서 늦게까지 잡아놓고 다음날 늦잠자면 하루만 더 있으라고 요청한다. 못이기는 척 하루씩 하루씩 미루고 있다.

<작별인사와 함께 단체사진>

  뜻하지 않게 매일 “굿바이”를 외치며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다. 언제까지나 이럴 수 없어 이제 ‘진짜’로 간다고 했다. 제법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던지 “잘 가”라고 한다. 다시 친구들이 모이고 삼겹살 파티를 벌인 후 다음날도 출발하지 못했다.

  진짜 크로아티아에서 직업을 구해 봐? 시내에 태권도장도 있던데 태권도를 제대로 배워 놓을 걸 그랬다. 대체 언제쯤 출발할 수 있을까?

<자그레브의 ‘단군’ 합기도-태권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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