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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53. 다시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테다

  자그레브에서 머문 한달 반은 정말 즐거웠지만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친구들은 더 있으라고 하지만 무비자 체류 가능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동안 함께 했던 우쿨렐레 선생님 토퍼도 얼마전에 티슈, 비누, 치약 등 생활용품을 한가득 남겨주고 떠났고, 뱅상, 까미유 등 프랑스 친구들도 오전에 떠났다. 이제 아쉽지만 나도 가야 한다.

<출발 준비 끝>

  장거리를 달리려면 아침일찍 출발해야 하지만 인사는 해야겠지? 기다리는 동안 유독 한글에 관심을 보이던 디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로 했다.

  한글 교육은 단 세가지. 1. 훈민정음-알파벳 변환표를 그려주고, 2. 자음+모음(+자음)이 한 ‘글자’를 만들며 한 글자는 한 어절이라고 알려줬다. 3. 자음 ‘ㅇ’와 모음 ‘ㅡ’는 소리가 없지만 ‘글자’를 만들기 위해 쓴다. 예를 들면 ‘ㄱ’를 글자로 만들기 위해 소리 없는 ‘ㅡ’를 붙인다.

  디노는 놀랍게도 채 15분이 지나지 않아 문자표를 보면서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한글 간판 읽을 수 있겠지?>


  직접 가르쳐 보니 한글은 정말 쉽고 효율적인 음가묘사수단이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발음기호’라는 존재가 정말 낯설었다. ‘a’가 [아] [에이] [애] 등 상황마다 달라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페인어 등은 소리나는대로 읽는다지만 상황에 따라 한 글자에 두가지 이상의 발음이 있다.(예. ‘g’ 등)

<최고의 숙소 LYC>

  키릴(Cyrillic)은 나라에 따라 변형이 너무 많고 일본 가나는 글자수가 두 배 이상임에도 표현이 더 제한적이다. 아랍문자는 위치에 따라 글자 모양이 변해서 알파벳 외우는 것 부터가 큰 장벽이다. 우측부터 쓰는것도 낯설고 모음 표현이 약하다. 모음이 약한건 히브리문자도 마찬가지고, 힌디어를 표현하는 데바나가리 문자도 글자수가 많고 변형도 많아보인다.

<자전거 정비도 끝냈고>

  특히 대표적인 ‘뜻글자’인 한자는 부수를 알아도 발음을 유추하기도 힘들다.

  단 24개 자모를 사용해 12,000여 음절을 표현(유니코드)하는 한글은 정말 대단한 글자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한글을 가르치면서 큰 문제는 너무도 쉬워 보이는 음절 구분을 잘 못하는 것이다. Zagreb(자그레브/자그렙), Dobro dan(도브르단/도블단)은 대체 3음절일까 4음절일까?

<이제는 가야 하는데>

  이유는 크로아티아어의 음절구분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영어의 ap·ple[애플]은 2음절, desk[데스크]는 1음절, stu·dent[스튜던트]는 2음절이다. 연음까지 일어나면 도무지 구별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악보에서도 우리 노래는 대부분 음표 하나에 한 글자씩 배정되어 있는데 영어 악보는 음표 하나에 여러 글자가 표시된 경우를 많이 봤다.

  어쨌든 금세 한글을 익힌 디노와 인터넷을 통해 한글 메시지를 종종 주고받는다. 여전히 음절 구분을 못하고 괴이한 글자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디노와 주고받은 한글 메시지>

  그러다 보니 벌써 오후 3시다. 다시 수차례 반복했던 작별인사를 나눴다. 이번에는 진짜다. 더 지체되면 친구들이 몰려올테고 오늘도 가지 못할거다.

  숙박비가 저렴하다지만 오래 머물렀더니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다만 그림값으로 상당부분 할인받았다. 얼마 전 장난으로 안나마리아를 그렸다가 반응이 좋아 주인 가족을 그려준 대가를 받은 것이다.

<안나마리아를 그렸다가><결국 주인 가족 모두>

  출발하려니 그동안 배낭을 묶고 다녔던 고무줄이 끊어졌다. 달마가 준건데. 루치아는 다른 짐끈을 하나 주면서도 가지 말라는 징조라고 또 잡는다. 매몰차게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미안, 친절한 루치아>

  자그레브를 떠나기 전 들릴 곳이 하나 더 있다. 교회에서 만난 바울 군은 얼마 전부터 반 옐라치치(Ban Jelačić) 광장 근처에 있는 한국 호스텔에서 일하고 있다. 호스텔에 들러 훗날 만남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바울군은 조심히 가라면서 한국 깻잎 통조림을 선물했다.

<반 옐라치치 광장의 Wing>

  아, 이제 진짜 끝이구나. 간만에 혼자 달리려니 좀처럼 속도도 나지 않고 힘들다. F=G·(m_1·m_2)/r^2. 아무래도 자그레브의 매력상수 G값이 엄청난가보다. 아니, 너무 오래 머무른게 이유다. 이를 벅벅 갈며 다시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친구들과 깊어가는 밤>

  그러다 보니 벌써 날이 저물고 있다. LYC에서 딱 하루만 더 머물까? 모두 좋아할텐데. 힘겹게 유혹을 뿌리치고 북서쪽으로 달리 Westgate Shopping City라는 대형 쇼핑몰이 나타났다. 서쪽에는 월드컵 기간 내내 듣던 노래의 주인공 Zaprešić Boys의 고향 Zaprešić이 있다. 자그레브 경계이기는 하지만 블랙홀은 탈출한 셈이다.

<마지막 숙소 Westgate Shopping City>

  이제 잠자리를 준비해야 한다. 마침 쇼핑몰 뒤편에 한적한 공터가 있다. 텐트치기도 귀찮아서 대충 텐트를 덮고 노숙하기로 했다.(7월 24일 주행거리 31.17km, 누적거리 10,582km)

<생각보다 불편한 밤>

  텐트덮고 자는건 생각보다 불편했다. 방수재질의 천이 밀착되어 땀 범벅이다. 그늘막처럼 걸어놓으면 모기밥이 될 테니 다른 방법도 없다. 결국 새벽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지만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우쿨렐레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우쿨렐레를 튕기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자그레브를 떠오르게 하는 우쿨렐레>

  그래도 피로감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점심식사 후 벤치에서 두어시간 낮잠까지 자고서야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낮잠이나 자자>

  E59 고속도로 옆의 1번 국도를 타고 달린다. 어느덧 Gornji Macelj 국경 근처인데 도무지 통행량이 없다. 아무리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있다지만 좀 이상하다. 의아하지만 가 보자.

<여기가 국경 맞나>

  국경에 도착했으나 검문소는 텅텅 비어있었고 조금 더 가니 길이 막혀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지도상에는 국경너머로 길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혹시 길이 엇갈렸나?

  주위를 배회해 봤지만 길은 하나뿐이다. 으으 크로아티아 매력상수 G는 정말 크구나.

<텅 빈 국경 검문소>

  멍하니 앉아있는데 마침 경찰 순찰차 한 대가 보인다. 열심히 경찰을 쫒아가 물어보니 이곳 국경은 폐쇄되었다면서 위쪽 길을 이용하라고 한다. 고속도로는 국경 앞에서 일반도로로 바뀐다는 것이다.

  다시 한참 돌아가서 신작로에 진입하니 드디어 진짜 국경 검문소가 나타났고 정들었던 크로아티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에 비싼 물가와 세르비아에서 들었던 악평 등으로 입국부터 썩 내키지 않았던 크로아티아. 그러나 열혈 ‘공산주의자’ 마르코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선입견이 사라졌고, 아드리아해의 풍경과 플리트비체 호수 등 내륙의 경치 또한 기가막힌 곳이었다.

<아름다운 크로아티아>

  비록 짧은 만남이었으나 박주하 선생님과 우주여행자, 심규범 군까지 자전거 여행자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으며 10,000km 돌파 및 플리트비체에서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특히 대체 어느 나라에서 ‘귀화’하라는 말까지 들을 수 있을까?

<벌써 옥수수 수확철이구나>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일원이지만 중 서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아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분위기를 선사한 크로아티아(Croatia). 아니 흐르바츠카(Hrvatska). 이제 정말 이곳도 끝이구나.

  여권에 진하게 새겨진 출국 도장만큼이나 진한 여운과 아쉬움을 남긴 크로아티아 여행을 마무리했다.

<크로아티아 자전거 여행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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