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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Hungary)

156. 헝그리(hungry)? 헝가리(Hungary)!

  하마터면 국경을 지나칠 뻔 했다. 슬로베니아(Slovenia)의 마지막 Pince 마을을 지나 양국 국경지대에 들어서자 칠흑같은 어둠만 자리잡고 있었다. 그나마 초라하게 서있던 표지판이 국경임을 알려주었다. 손전등을 비추며 사진촬영을 시도해봤지만 반사판 외에는 찍히지 않았다.

<헝가리 국경 표지>

  표지판에 새겨진 Magyarország. 마자르 공화국이 헝가리의 정식 국명이다.

  금세 헝가리의 마을이 나왔으나 가게는 모조리 문을 닫았다. 민가에서 희미한 불빛만 흘러나올 뿐 도시는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헝가리 물가가 저렴할 것이라는 생각 뿐 헝가리돈도 없었다.

  어쩔수 없이 석식을 생략하고 Dobri 외곽의 도로변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7월 26일 주행거리 88.48km, 누적거리 10,783km)

<헝가리의 첫날밤><출발 전의 여유>

  샛길을 한참 달리자 7번 국도로 이어지면서 길이 넓어지면서 Becsehely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소박한 마을길>

  가장 먼저 환전소를 찾았다. 헝가리 화폐단위는 포린트로 1포린트에 약 5원정도다. 그동안 지난 나라 중 가장 큰 화폐단위다.

  화폐단위가 커지면 연산하기도 불편하지만 무엇보다 읽기가 골치아프다. 특히 10,000 = ten thousand(십천) 따위는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다. 하지만 헝가리에서 낯선건 이뿐만이 아니다.

<헝가리 포린트>

  우선 라틴어 기반이 아니며 슬라브어와도 접점이 없다. 동-서유럽 사이의 섬인 셈이다.

  로마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단 헝가리식 이름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당장 이 도시 이름도 도무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베테헤이/처럼 발음하는데 cs가 /t/ 음가인가? 그럼 t는 어떻게 읽는거지?

<베테헤이 마을>

  글자는 차차 알아가면 되고 일단 배부터 채우자. 크로아티아에서 헝가리의 굴라쉬(goulash)라는 매운 수프를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얼큰한 음식이 그리웠는데 상당히 기대된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 굴라쉬를 못알아듣는다. red colored chilly soup이라고 설명하니 “아 구야시”라고 한다. Gulyás라고 쓰고서 구야시라고? 설마 l이 묵음인가?

<굴라쉬 한 그릇>

  굴라쉬? 구야시?는 고기와 콩이 들어있는 국이었다. 크로아티아 친구들 입장에서는 매운지 모르겠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밋밋하다. 조금 더 맵게 하고 토란이 들어가면 육개장 느낌도 날 것 같다. 특이한건 빵과 함께 나온다.

<비에 젖은 도로>

  한참 식사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며 메일을 확인해 보니 부다페스트(Budapest)의 에릭이라는 카우치서핑(Couchsurfing) 호스트에게서 초대 승락이 와 있었다.

  부다페스트까지만 가면 편히 쉴 수 있겠구나.

<사일리지가 늘어선 들판>

  비가 그친 후 다시 길에 나선다. 오르막이기는 했으나 매우 완만해 편안히 달릴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북부 산지도 해발 1,000m가 채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지평선이 보이는 드넓은 들판이 인상적이었고 자전거여행에도 최적의 지형이다.

<헝가리의 대평원 시작>

  드넓은 들판 사이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마을은 소박한 인상을 전해준다.

<헝가리 시골 마을>

  헝가리 전도(全圖) 보면 부다페스트에서 서남부 방향으로 마치 운하처럼 보이는 길쭉한 호수가 하나 있다. 바로 동유럽 최대 호수인 Balaton 호수다.

<운치있는 철길>

  호수를 따라 계속 달리다 Balatonbogla’r라는 마을의 공터에서 하루를 정리했다.(주행거리 103.45km, 누적거리 10,887km)

<나무근처에서 캠핑>

  에릭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날 중 부다페스트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크로아티아(Croatia)-슬로베니아 국경과 슬로베니아의 Boreci에서 길을 헤멨고 전날 비까지 내리면서 생각보다 발걸음이 늦어졌다. 부다페스트는 150km이나 떨어져 있다.

  달릴 수 있는데 까지 달려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한다.

<화목한 헝가리 가족>

  아쉬운건 Balaton 호수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여유있게 캠핑하면서 하룻밤 보냈으면 좋으련만…….

<폐 정류장 근처에서 잠시 휴식>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무시하고 달리려 했으나 빗줄기는 점점 굵어진다. 결국 근처 한 주유소로 피신했다.

  물어보니 이곳은 세케슈페헤르바르(Székesfehérvár)라는 괴이한 이름의 도시 전방이다. 여기서 부다페스트는 약 60km정도 남았다.

  마침 오토바이 여행자 부부도 비를 피해 주유소로 들어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헝가리 이름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이름을 적어두었으나 부다페스트에서 어이없는 사건으로 분실했다.

<오토바이 여행자 부부>

  아무튼 나이가 제법 많아 보이는 이 부부는 청바지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오토바이 한 대로 함께 다니고 있었다. 늘상 느끼지만 유럽인들의 삶은 정말 여유로워보인다. 그러던 중 비가 그쳤고 서로 안전한 주행을 기원하면서 헤어졌다. 어느새 18시. 두어시간 내에 해가 질 것이다. 이제 정말 빨리 움직여야 한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 세케슈케헤르바르 시내를 우회하는 도로를 선택했다. 7번국도는 도시를 북쪽으로 돌아 부다페스트로 이어진다. 남쪽 길은 8번국도-E71도로를 거쳐 다시 7번국도와 만나며 약 7km 가량을 줄일 수 있다.

<헝가리 7번 국도>

  그런데 남쪽 길을 선태하니 M7 고속도로로 이어진다. 급히 갓길에 자전거를 세우고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해보니 맞는 길이다. 알고보니 E71 도로가 M7이었다. ‘E’가 붙은 도로는 항상 골칫거리다.

  M7은 헝가리 등 각국 자체적인 도로체계이고 E71은 유럽연합에서 지정한 도로번호 체계로 한국처럼 서에서 동, 북에서 남 순으로 남북은 홀수, 동서는 짝수로 번호를 부여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숫자만으로는 고속도로(자동차 전용도로)인지 일반 국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국에서 부여한 도로번호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도로표지는 제각각이지만 ‘A’ 또는 ‘M’으로 시작하는 도로는 자동차전용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내 실수다. E71이 자동차전용도로인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왜 갑자기 고속도로가?>

  사실 넓찍한 갓길과 양호한 포장을 갖춘 고속도로가 달리기에는 더 좋다. 다만 대형트럭이 곁을 지나칠때는 자전거가 휘청거리며 나들목, 분기점 등을 지날때는 주의해야 한다. 뒷차와 간격이 일반 도로라면 여유있어 보이는 거리라도 시속 100km 이상 달리는 차는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치며 나들목 폭도 상당히 넓다. 특히 어두워지면 고속주행하는 차량이 조그만 자전거를 인식하기도 힘들다.

  또한 터키(Turkey)나 인도(India)처럼 고속도로상 이륜차 주행을 허용하는 국가가 있는 반면 대부분 국가는 이륜차 진입을 통제하며 유료도로일 가능성도 높다. 어쨌든 빨리 벗어나는게 상책이다. 약 7.5km가량 이어진 E71을 전속력으로 통과하니 다시 한적한 국도가 이어졌다. 휴, 이제야 한숨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만난 7번국도는 아예 자전거길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거 완전히 극과 극이다.

<달리기 편한 자전거길>

  문제는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중 주행은 흙이 튀어 바지가 엉망이 될 뿐만 아니라 도로가 젖으면 미끄러워 속도를 낼 수도 없다. 핸들바 가방의 방수커버도 여기저기 뜯어져서 방수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핸들바 가방에 비닐봉지를 두르고 판초우의를 뒤집어쓴 채 천천히 달린다.

<우중충한 하늘>

  시골길이 끝나면서 비가 그쳤다. 부다페스트 근교의 에르드(Érd)부터는 대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다.

  전날 중식으로 먹은 굴라쉬 한그릇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빨리 가야 한다는 다급함에 이날 식사를 모조리 걸렀다. 이상하게 헝가리에서 계속 굶고 있다. 아무래도 나라 이름 때문인가 보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어 피자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가게는 대부분 영업을 마쳤다. 여기도 놓치면 정말 아무것도 못먹겠다 싶어 피자 한판을 주문했다. 가격은 780포린트. 4,000원이 채 안된다. 피자 한판을 주문해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전화기를 빌려 에릭에게 통화를 시도했더니 받지 않는다. 벌써 잠들었나? 에휴 결국 늦었구나.

<해바라기 밭이라도>

  이제 어쩐다?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하나? 급히 숙소를 검색해 봤지만 가격대가 만만치 않다. 결국 오늘은 쫄딱 젖은 채 제대로 씻지도 못하겠구나. 무엇보다 에르드에서 야영할 곳을 찾지 못했다. 다시 왔던길을 돌아가 시골 공터를 찾아봐야겠다.

  지도를 살피는데 갑자기 점원이 부른다. 에릭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에릭은 밖에 나와있고 늦게 들어갈 예정이라면서 집 비밀번호를 불러줬다. My house is your house라는 말을 남긴 채 먼저 들어가 자고 있으라고 한다. 세상에는 참 고마운 친구들이 많다.

  숙소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서두를 일은 없다. 느긋하게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어야 하지만 에너지를 막 보충한 상태라 크게 힘들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내려다 보기>

  산 중턱에 올라서니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자정이 넘었음에도 도시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체코의 프라하와 더불어 유럽 3대 야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러한 3대 ○○는 대부분 나머지 하나가 가변적이다. 유럽 3대 야경의 마지막은 프랑스 파리라는 말도 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라는 말도 있다.

  확실한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다. 배가 부르니 앞만 보고 달리던 길이 새롭게 보인다.

<겔레르트 언덕과 도나우 강>

  마치 병풍처럼 부다페스트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겔레르트 언덕(Gellért-hegy) 위에는 조각이 조명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나우 강(헝가리어 Duna, 독일어 Donau, 영어 Danube)에는 다리가 여럿 있었으나 유독 백색 조명이 설치된 에르제벳 다리(Erzsébet híd)가 인상적이었다.

<에르제벳 다리와 Belvárosi 성당>

  에르제벳 다리 끝에는 한 성당이 부다페스트 진입을 환영하는듯이 서 있었다. 이제 급할 것도 없으니 야경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사진 몇장을 찍으니 관광명소를 비추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쳇. 오늘은 빨리 들어가 쉬어야겠다.

<불 꺼지기 직전 부다페스트 시가지>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에릭의 집은 찾기 쉬웠다. 씻고 나오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에릭이 늦을거라고는 했으나 그래도 주인을 기다리는게 예의겠지? 에릭을 기다리려 했으나 소파가 너무 편했다. 한 10분 버텼을까?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주행거리 150.52km, 누적거리 11,0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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