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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에미레이트(UAE)

053. 두바이의 좋은 만남과 슬럼프

  느닷없이 아랍 에미레이트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 이란 비자 취득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말이 지나자 마자 이란 영사관에 찾아갔다. 이란 영사관은 숙소였던 오픈 비치 근처라서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영사관에 들어서니 대기인원도 거의 없었다. 예감이 좋다. 번호표를 받고 마침내 내 차례.

  창구 직원은 여권 표지를 보자마자 별 질문도 없이 "No" 서울에서 받으라고 한다. "너같으면 비자 받으려고 서울 가겠냐?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더니 메모지에 SADAF라는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 준다. 해당 여행사를 통해서 서류 접수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한다.

  다시 두바이 크릭을 건너 SADAF라는 여행사를 찾아갔다. 직원은 친절하였으나 대답은 원하던 답이 아니다. 서울의 이란 대사관에 서류를 요청해야 하는데 20 Working day가 소요되며(한 달 이상) 서류를 받으면 비자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 서류대행비는 Dh600이며, 거절시에도 환불은 없고, 비자발급비는 불포함.

  친절하게도, 나는 UAE에 한달밖에 체류하지 못하므로 서류 오기전에 다른 나라에 나갔다 오라는 안내까지 해 주었으나 이런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기에는 너무 크다. 이로서 이란 - 페르시아 제국의 꿈은 좌절되었다.

앞에 공주가 기다리고 있는데……. 좌절된 페르시아왕자의 꿈

  어린시절 페르시아왕자 게임을 하며 친숙해진 곳. 또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친절하고 물가도 싸고, 볼거리도 많다고 극찬을 들었던 이란.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연합군에 진 계기로 마라톤이라는 스포츠가 생겼고, 그래서 세계 유일의 마라톤을 하지 않는다는 나라. 이란에서 조깅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나는 학교다닐때 대체 뭘 했길래, 세계사는 대부분 게임 아니면 만화책으로 배웠을까? Street Fighter, 페르시아왕자, 대항해시대, Age of Empire 등이 내 세계사와 지리 지식의 근원이다.

두바이 크릭 주변의 야자수

  여행사를 떠나는 발걸음은 무겁다. 이제 뭘 해야 하지? 그냥 샤르자에서 바로 갈아타는 패키지로 다른나라로 갈걸. 괜히 시간과 비용만 낭비한걸까?

  업친 데 덥친격으로 장갑이 찢어졌다. 인도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기는 했는데, 왼쪽 손바닥 부분이 아예 찢어진 것. 가죽장갑인데 이렇게 약하다니……. 네팔에서 살 걸 괜히 방치했다. 하필이면 물가 비싼 UAE에서 찢어질 게 뭐람?

수명을 다 한 반장갑

  그러고 보니 UAE에서 교체한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치약. 치약은 끝이 보이길래 네팔에서 사 왔는데, 저렴하기에 집어든게 최악의 선택이었다. 치약에서 물파스맛이 난다.(Tip. 한국에서 파는지 모르겠지만, 물파스맛을 느끼고 싶지 않으면 Red Hot은 피할 것)

물파스맛 Red Hot

  답답한 마음에 두바이 크릭으로 향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는데는 물가가 최고다. 서울에선 한강, 목포에서는 동아리방 앞 바다, 포항에서는 임곡리 해안. 여기서는 두바이 크릭이구나.

현대식 건물과 전통 목선이 어우러진 두바이 크릭

  시원한 두바이 크릭은 그나마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줬다. 일단은 이왕 들어온 아라비아 반도를 둘러 구경해 봐야겠다. 그런데 아라비아반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우선 무슬림 외에는 관광비자도 안내준다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북쪽을 막고 있고, 사우디를 통과해도 이라크와 시리아, 남쪽의 예멘 모두 여권사용제한국이다. 결국은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다.

두바이 크릭에서

  일단은 당분간 UAE의 다른 나라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라라고 표현을 해야하나? UAE는 에미레이트라는 이름의 7개 국가의 연합체다. 아랍 토후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봤는데, 직접 본 두바이는 토후국이라는 명칭이 안어울리는것 같다. 토후라면 왠지 지방호족이나 부족장, 추장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침 두바이 크릭 주변에 전통마을(Heritage Village)가 있었다.

잘 정돈된 Heritage Village. 역시 낮에 사람은 없다.

  바로 강 건너편에는 화려한 빌딩들이 즐비하지만, Heritage Village는 내 환상속의 아랍 마을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골목 구석구석에 흥미로운 볼거리도 많았다. 모스크도 있고, 입장료도 없는 조그만 박물관들. 특히 낙타 박물관(Camel Museum)은 전시도 잘 해놓았고, 중동과 어울려서 괜찮은 박물관이었다.

Camel Museum과 Horse Museum의 전시물

  골목을 누비고 다니다가 Philatelic House를 발견하여 들어가 봤다. 이곳은 전시 상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일단 에어컨이 안나오는게 가장 큰 불만.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사실 샤르자(Sharjah)행 비행기를 예약하면서부터 샤르자라는 낯선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릴 때 우표수집을 하면서 친구들과 교환도 많이 했다.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Sharjah라는 우표가 몇 장 있었는데,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었던 국민학생들이 나름대로 지도를 찾아봤으나 이런 나라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가짜우표 시비에 휘말렸고, 이에 분노하여 갖고있던 외국우표는 모조리 한국우표로 바꿔버렸다. 꽤 가치있는 우표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영어교육을 안받은 국민학생이 알 수 있는것은 USA, 日本 등 몇개국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71년까지 UAE는 토후국들이 각각 우표를 발행했고, Philatelic House에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Philately는 우표수집이라는 뜻이다.

샤르자 우표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Sharjah우표 가짜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란행이 좌절되고, 일주일간 해변에 머무르며 다음 목적지를 찾는 도중, 네팔에서 두바이 숙소를 검색하다 한인교회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슬람 국가에 교회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여기나 한 번 가볼까?" 마침, 금요일. 예배가 있는 날이다.

두바이 한인교회의 내부

  별 이유없이 한인교회에 찾아갔는데, 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이 많던 한국인들이 왜 안보였던걸까?

  알고보니 UAE에 4,000명 이상의 교민들이 있다는 것. 하루종일 관광지나 길거리만 돌아다닌 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못만난게 당연했다.

  교회에서 생각도 못한 인연을 만났다. 바로 최용준 선배. 국립목포해양대학교 해양전자공학과. 같은과이며 동아리 선배다. 세상에. 이 먼곳에서 우연히 용준이형을 만나다니. 비록 100km이상 떨어진 라스 알카이마(Ras Al-Khaimah)라는 곳에 있어서 금세 헤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정말 반갑고도 신기한 만남이었다.

  교회에서는 뜻밖의 대접도 많이 받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데 이것저것 잘 알려준 서형일氏, 해병 예비역 최문한氏, 최유진氏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차를 타고 드라이브도 하고. 동갑인 김미정氏는 음식을 주셨다. 모두 감사합니다.

오. 김이다. 성재의 소포이후 UAE에서도 한식을~ ♬

  특히 김선용 목사님은 사택을 허락하여 주셔서 며칠간 머무르게 되었다. 짐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교회도 함께 다니고,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긍지를 갖고 삶을 개척해 나가는 교회 청년들을 만나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시계탑

  그런데, 두바이에서 청년들을 만나며 갑자기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만난 여행자들은 대부분 휴가, 휴직, 퇴직기간을 이용한 여행자들이라 그런 생각이 안들었는데, 여기서 만난 한국인들이 이국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제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여행 중 내 입장을 부러워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도 자리잡고 있는 모습에 괜한 자격지심이 들기도 하고……. 음. 슬럼프인가?

  특히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다른 여학생들이 인턴으로 이 멀고 더운곳 까지 와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까지 놀기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은 더 커졌다.

일하고 싶어서 기껏 찾아간게 공사장이냐. 게임 페르시아 왕자가 연상되던 공사현장

  하지만, 취업도 좋지만 이런 기회는 아마 은퇴하기 전까지는 다시 오지 않겠지? 아직 뭔가 만족스럽지 않으니 더 돌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되고 어느 새 시간도 많이 흘렀다.

  적당한 휴식은 약이지만, 몸이 너무 편하면 게을러진다. 게다가 밖은 너무나 덥다. 40℃가 넘어가는 날씨.

그늘막이 무색하게 한낮의 더위는 동네 개구장이들을 다 쫒아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목사님께 신세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 중동의 햇볕은 뜨겁지만 내 열정은 그보다 더 뜨겁다. Wing에도 다시 기름칠을 해 주고, 다시 출발이다. 또 다른 에미레이트를 향해~

UAE선적 카 페리 Al Shindaga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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