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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24.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위치도 애매한 미쿨리치(Mikulići) 자연공원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마케도니아의 보얀의 추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를 가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린다는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Croatia) 최고의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여행지라고 한다. 반면 두브로브니크의 숙박비는 매우 비싸서 쉽게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동격실(도미토리)도 최소 2만원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

  한편 두브로브니크 근처의 다른 호스트와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선택지는 마르코의 집 밖에 없었다. 미쿨리치는 두브로브니크에서 35km가량 이격되어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루에 왕복 할 만한 거리다.

<바위산을 지나 두브로브니크를 향하여>

  두브로브니크를 빨리 보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굵은 비 때문에 하루 더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맑은 아침. 두브로브니크로 출발하기로 했다.

  아드리아해를 끼고 달리는 기분좋은 길. 두브로브니크는 한참 멀었지만 왜 이곳을 추천하는지 벌써 알 수 있을듯 했다. 가는 길 마다 기가막힌 경치가 이어진다.

<왼쪽에 아드리아해를 두고 두브로브니크를 향해>

  풍경만으로는 정말 낙원이 따로 없었다. 반면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아무리 낙원이면 뭘하나 내가 편히 쉴 곳이 별로 없는데…….

  뱀이나 늑대, 멧돼지가 나타나므로 함부로 캠핑하지 말라는 마르코의 경고와 상대적으로 비싼 크로아티아의 물가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사정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거절하는 웜샤워(Warm Showers)와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 호스트들에 의해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차가울 거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가는 길은 바위산에 꼬불꼬불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진다.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짐이 없으니 적당히 달릴만한 길이다.

<평평하지(Flat) 않다고? 표지판은 Plat마을을 지났다는 뜻이다>

  두보르브니크 진입 직전 도로 사이에 쉼터가 있었다. 아드리아해와 멀리 두브로브니크가 보이는 곳. 역시 절경이다. 식사도 할 겸 여기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브런치 메뉴는 코토르(Kotor)에서 준비해 온 삶은계란.

  식사도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갖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바로 버스를 대절해 온 중국 관광객.

  그들은 조용한 휴식처를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선입견을 배제하려고 해도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안하무인이고 다른사람들 생각은 안하는건지.

  그들의 등쌀에 밀려 쉬고 있던 사람들은 차례로 자리를 떴고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멀리 보이는 두브로브니크>

  오르막은 그 후에도 제법 계속되더니 신나는 내리막이다. 마침내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내리막은 두브로브니크 성벽까지 이어졌다.

<내리막을 달리면 두브로브니크 구 시가지>

  와, 도착한 시내는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형 버스는 쉴새없이 관광객을 토해 낸다. 그동안 발칸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동네에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린걸까?

<북적북적한 두브로브니크 시내>

  우선 성벽 서쪽의 Pile(필레) 문을 통해 구시가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마을이므로 입장료는 없다. 그런데 필레 문으로 연결된 좁은 다리는 초만원이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건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피해만 줄 것 같다.

  다리 아래 작은 공원에 Wing을 묶어 놓고 몸만 가볍게 성문에 들어섰다.

<필레 문에 몰린 수많은 인파>

  첫번째 방문지는 성벽 그 자체다. 둘레가 2km가량 되는 두브로브니크 성벽에 올라갈 수 있다. 입장료는 100쿠나(약 20,000원). 역시 비싸다. 다행히 학생증을 제시하니 30쿠나만 받는다. 와, 이거 괜찮은데?

  줄을 지어 성벽에 올라섰다. 성벽에는 한국인 관광객도 매우 많았다.

<성벽에서 내려다 보는 구 시가지>

  아니 성벽 뿐만이 아니다. 두브로브니크 어디나 한국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에서 크로아티아가 이렇게 인기있는 여행지였나?

<작은 망루의 창을 통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두브로브니크는 과연 멋진 곳이었다. 주황색 기와로 덮힌 시가지. 그리고 내려다 보이는 파란 바다. 물결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바다에는 많은 단정과 카약, 요트가 떠다닌다. 지갑과 카메라만 아니었으면 나도 바다에 들어갔을텐데. 혼자 다닐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아, 물에 들어가고싶다>

  구 시가지는 몬테네그로의 부드바(Budva)나 코토르와 비슷한 분위기지만 그보다는 규모가 크다. 크다고는 하지만 한바퀴 도는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아서 더욱 좋았다.

<보트도 한 척>

  유럽인들은 모르는 사람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인사하는게 좋아서 나도 금세 따라하게 되었다.

<종 3개가 걸린 종탑>

  게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들이다. 한국인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인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더 그렇다. 마치 '쟤는 뭔데 아는척이야?' 이런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들도 내가 처음 그랬던 것 처럼 낯선 걸까? 아니면 내 몰골이 볼품없어서? 아무튼 굳이 한국인들에게 인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피차 한국인인걸 알고, 같은 코스를 걸으면서 모른척 하는것도 영 뻘쭘하다.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과는 반갑게 인사하고 말을 섞으면서, 오히려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데면데면하다니.

<성벽을 거닐며>

  그런데 성벽에서 만난 박민규씨는 편하게 인사를 받아 주었고, 함께 다니게 되었다. 그에게서 한국인이 많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드라마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아무튼 '꽃보다 남자'라는 TV프로가 크로아티아를 무대로 방영되었고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다. 아, 이 프로는 경호형님께도 들어본 것 같다.

  두브로브니크가 멋지기는 하지만, 설마 TV 한 번 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나? 대체 얼마나 잘 만든 프로그램이기에? 의아하고 호기심을 자아낸다.

<박민규씨와 함께>

  두브로브니크는 1,300년 전 그리스의 Epidaurus(에피다우루스)의 피난민들이 이주하여 건설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Ragusa(라구사)였다.

  얼핏 봐도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생활터전을 잃은 난민들이어서 이곳을 선택했을까? C자 형태로 동쪽의 항구를 감싸고 있는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북쪽~동쪽은 Srđ(스르지)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서쪽은 바다로 둘러싸여있다. 스르지산을 1지대 방호선으로 삼아 남동쪽 도로를 차단하면 공략하기 쉽지 않을 듯 하다.

<절벽위에 쌓은 성벽>

  라구사는 베네치아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베네치아 역시 훈족을 피하려는 피난민들이 세운 도시다. 에피다우루스 난민들 역시 서로마 제국 멸망이나 훈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비슷한 시작처럼, 라구사는 베네치아와 경쟁하며 발전해 나간다. 초기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제하에 있었으나 14세기 독립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한다.

<두터운 성벽으로 보호받는 두브로브니크>

  이후 라구사 공화국은 흑해와 지중해를 아우르는 무역기지로 성장했으나 두 차례나 도시를 덮친 지진과 신항로 개척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천혜의 요새도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의 말발굽을 피할 수는 없었다. 화약무기의 발전으로 이미 두터운 성벽만 믿는것은 한물 간 전술이었다. 라구사 공화국은 결국 1808년 멸망한다. 라이벌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몇 년 전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

<과거 번영을 누린 구 항구>

  두브로브니크는 이후 또 한차례 위기를 겪는다.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전쟁 중 폭격을 받아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두브로브니크 보호를 위해 성벽과 해상에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마르코의 배가 전쟁중에 침몰했다는데 고향을 지키기 위한 해상 시위에 참가했나보다.

  이후 다행히 두브로브니크는 빠르게 복구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원형을 보존한 복구작업으로 두브로브니크는 21세기에도 중세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계탑.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어 1928년 복구했다>

  세르비아군은 참 운도 없다. 군사 요충지를 공격했는데 하필 그게 두브로브니크였다. 인종청소는 물론이고, 전 세계로부터 비난거리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두브로브니크가 크로아티아의 월경지로 남은 것도 국제사회의 보호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Cathedral of the Assumpthion of the Virgin)>

  두브로브니크는 꼭 어디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아야 한다기 보다, 구 시가지를 걷기만 해도 좋은 곳이었다. 구 시가지에서 가장 넓은 Placa(플라차) 대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도로 끝에는 멋진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측에 위치한 건물은 St. Blaise's(성 블라이세) 성당이다. 성당 앞에 있는 조그만 탑은 기사 롤랑이 새겨진 국기게양대다. 이 성당 역시 지진의 피해를 입었고,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복구했다고 한다.

<성 블라이세 성당과 기사 롤랑><문 뒤쪽이 플라차 대로>

  문을 나서자 항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전방의 섬을 돌아 오는 유람선 호객꾼들이 극성이었다. 여기서 뱃놀이를 해도 정말 좋을 것 같지만 감당하기 힘든 요금에 보트투어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투어용 보트가 가득한 항구>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 간만에 생긴 일행 덕분에 내 사진을 몇 장 건졌다. 사진을 잘 찍는 박민규 씨는 기습적으로 내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사실 나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증명사진처럼 표정이 고정된다.

<항구에서. 박민규씨의 사진>

  나도 모르게 찍은 사진은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게 마음에 든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느낀 즐거움이 그대로 묻어있는 것 같다. 아, 카메라 의식하지 않으면 원래 이런 표정이구나.

<성벽에서. 박민규씨의 사진>

  다시 구 시가지로 돌아오니 성 블라이세 성당 앞에서는 전통 음악 공연이 한창이었다. 자기들 끼리는 서로 다르다고 피터지게 싸웠지만, 내가 보기에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나 음악도, 복장도 거기서 거기다.

<크로아티아 전통 공연>

  관광객이 넘쳐나는 두브로브니크도 결국 삶의 터전이다.  골목 사이사이 널려있는 빨래가 여기는 주거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관광수입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지만 생활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구 시가지에는 차도 들어올 수 없다. 계단도 많은데 짐이라도 있으면 힘들 것이다.

  거기다 관광객들은 주거지 골목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집을 너머다 본다. 때로는 불편하고, 불쾌할 때도 많을 것이다.

<두브로브니크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일 뿐>

  어느 골목, 아시바(비계) 위로 눈길을 돌리니 수리 작업이 한창이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아직도 중세 라구사를 느낄 수 있는건 이런 분들의 노고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도시는 약간의 수리 외에는 증축도 재건축도 불가능하다.

<더운 날씨에 작업 중>

  예전, 경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물이 많아서 함부로 땅을 팔 수도 없고, 재건축도 힘들다고 한다. 덕분에 경주는 잠시 머물기에 좋은 곳이 되었지만, 거기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힘들어한다.

  그래도 이런 곳에서 살면 약간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을까? 음. 나한테는 안맞는것 같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는 두브로브니크는 분명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관광객이 너무 많고 상업화된 두브로브니크에서 관상용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골목길은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로 뒤덮혔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덜 알려진 코토르가 더 좋았다. 두브로브니크는 계륵.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쉽지만 머무르기는 부담스럽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코토르다.

  뭐, 그렇다고 두브로브니크가 별로라는건 아니다. 정말 멋진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코토르에서 너무 눈이 높아져버렸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멋진 한나절을 보내고 이제 마르코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 박민규씨와도 인사를 나누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성을 나오니 두브로브니크가 마중을 나왔다. 성 블라이세 성당 앞에서 공연하던 분들이 시가행진으로 따라나온 것이다. 그래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전통 공연팀의 시가 행진>

  마지막까지 멋진 기억을 선사해 준 두브로브니크. 자꾸 코토르와 비교해서 미안해. 이제 안녕.(5월 3일 주행거리 73.50km, 누적거리 8,884km)

<아드리아해를 따라 굽이굽이 펼쳐진 해안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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