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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39. 무지개를 등지고 아드리아해 달리기

  이반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Crveni Grm 국경이 나타났다. 국경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으나 통과에 별 문제는 없었다. 이제 월경지가 아닌, 크로아티아(Croatia) 본토다. 이어지는 길은 처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i Hercegovina; BiH)에 진입했을 때와 같은 바위산길이다.

<크로아티아 측 국경>

  오르막 내리막이 있긴 하지만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달리기에 문제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도로 아래쪽을 내려다 보자 넓은 들판이 보이는데. 우와, 녹색과 흰색 크레파스를 단계별로 섞은듯한 색이랄까? 녹색이 이렇게 다양하고 멋질 수 있구나! 처음보는 색의 들판은 그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신비한 색의 들판>

  얼마 지나지 않아 Vrgorac이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서 중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식사 후 마을을 둘러보니 바위산과 석조건물들이 조화를 이룬 멋진 곳이었으며, 마을을 벗어날 때쯤 되니 작은 첨탑을 가진 멋진 성당도 보인다.

<멋진 첨탐이 있는 Vrgorac의 성당>

  잠시 지나 갈래길이 나왔다. 망설임 없이 이반이 추천해 준 샛길-512번로 들어섰다. 차량 통행량도 적었고, 계속되는 내리막길이라 전혀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멀리 바다가 보여 경치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신나게 달리는 길>

  오오 이런 내리막이라니, BiH에서 산을 타며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항구도시 Makarska까지는 쭉 내리막이고 그 다음부터는 아드리아해를 따라 달리는 해안도로다. 오늘 중 목적지 Split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겠다.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내려달리는 도로>

  페달을 전혀 밟지 않고도 50km/h 가까이 속도가 난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달린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지나다니는 차가 전혀 없는 것. 아무리 인구가 적어도 이럴 수가 있나? 길이 맞기는 한건가? 이상한 마음에 지도를 보지만 분명 길은 맞다.

  뭐 설마 길이 끊기는건 아니겠지? 갈 수 있는데 까지 가 보자.

<산비탈에는 작은 마을이>

  역시 이상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못가 도로공사구간이 나타난 것이다. 아스팔트 포장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었다. 아까 갈래길까지 한참을 돌아가서 큰길(62번 도로)을 타야한다.

  진작 표지라도 해 놓던가. 아마 크로아티아어로 표시가 되어 있었겠지만, 이 길을 다시 돌아갈 수 는 없는 노릇이고, 4~5시간은 손해를 볼 듯하니 시간도 빠듯하다.

  자전거는 차량보다 폭이 좁으니 양해를 구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통행을 허가받아 지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포장구간을 지나면서 막 살포한 뜨겁고 끈적끈적한 아스팔트가 바퀴에 묻어버린 것이다. 아스팔트는 타이어 표면을 살짝 녹이면서 조그만 돌맹이를 모두 바퀴로 끌어당겼고, 금세 바퀴가 구르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아스팔트 살포 중>

  타이어에 눌러 붙은 자갈을 떼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으 군자는 대로로 다닌다던데, 조금 빠르자고 괜히 이 길로 와서 고생이네.

  '에휴, 이걸 다 떼도 타이어에 어차피 자갈이 다시 들러붙을텐데 어쩐다?'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예 타이어에 흙을 발라버려야겠다. 음. 그러면 타이어가 미끄러워져서 위험하려나? 그래도 일단 해 보자'

  타이어 보수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겼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빗방울까지 떨어진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Makarska를 지나 해안도로에 진입했다. 예상했던 대로 해안도로는 작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시간은 벌써 19:00 슬슬 해가 지고 있다. 다행히도 비는 금새 그쳤고, 어느새 길어진 해는 아직 길을 비추고 있었다.

<오오, 무지개가>

  그때 문득 길을 돌아보니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알바니아에서 보고 처음 보는 무지개네. 마치 크로아티아 재 입국을 축하하는 듯 보이는 무지개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무지개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나 무지개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해안과 무지개를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은 현실을 떠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꼼짝없이 야간주행을 해야겠구나. 성경의 무지개는 다시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라지? 오늘 나름 고생했는데, 제발 비만 내리지 않기를.'

  야간주행을 하려면 흙으로 감싼 바퀴도 문제겠구나. 그런데 바퀴를 살펴보니 제법 깨끗해져 있었다. 저 잠깐의 비 때문에 흙이 쓸려 내려간건가? 정말 다행이구나.

  드디어 모든 근심을 떨쳐버리고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지난번 두브로브니크 근처에서도 느꼈지만, 아드리아해를 낀 해안 도로는 정말 장관이다. 왼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다.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즐겁게 달렸다.

<붉은 노을을 따라 달리다><구름 사이로 빛나는 태양은 마치 UFO같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졌다. 도로에는 가로등 하나 없고, 멀리 바다넘어 마을의 불빛만 희미하게 보인다. BiH에서도 그러더니 마을은 십여 km마다 드문드문 있고, 이 시간까지 열린 가게는 하나도 없다.

<아드리아해의 야경>

  별빛을 벗삼아 즐겁게 달릴 수 있었지만, 마음껏 속도를 내지 못해 야간주행은 늘 효율이 떨어진다. 벌써 자정이 가까웠고 아직 스플리트는 20km 이상 남아있다. 아무래도 오늘 스플리트까지 가는건 포기해야겠다. 가 봤자 잘데도 없으니 이 근처에서 숙영지를 찾아보자.

  스플리트가 다가오면서 주위는 Auto Kamp 표지로 가득해서 해변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캠핑장이라기 보다 민박에 가까운 형태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아무런 표시가 없는 해안 진입로가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와 주위를 확인해 보니 리조트를 짓는 중인지, 파라솔이 설치되어 있고, 포장된 바닥까지 있다. 인적도 없는게 아주 좋다. 바로 여기구나!

  우선 비상식 BiH 라면하나 끓여 먹고 신속히 텐트를 설치했다. 소화도 시킬 겸 잠시 밤바다를 거닐었다. 밤바다는 늘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합숙하던 생각, 그때의 친구들, 당시 듣던 노래, 해안경계작전간 순찰나가 바라보던 밤바다와 이런저런 아련하게 떠오르는 추억들을 파도소리에 묻으며 잠을 청했다.(5월 27일 Podstrana 근처 해변 숙영, 주행거리 107.86km / 누적거리 9,579km)

<크로아티아의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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