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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0. 폭군 황제의 마지막 선물. 스플리트

  날이 밝자 주위를 둘러보니, 전날 잔 곳은 생각보다 더욱 멋진 곳이었다.

<그림같은 숙영지>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보이는 해안은 말 그대로 그림같았다. 벌써 이정도인데 스플리트(Split)는 과연 어떤 곳일까? 발걸음을 재촉한다.

<스플리트 근처 해안>

  한 30분이면 스플리트에 도착하려나? 그런데 뒷바퀴에서 이상한 느낌이 전해진다.

  구석으로 옮겨 바퀴를 살펴보니 으 펑크가……. 도로 근처의 주차장으로 옮겨 타이어를 정비한다. 오랜만에 겪는 펑크라 그런지 조치가 더디다.

  그런데 튜브를 살펴보니 주입주가 찢어져 있었다.

<어라 튜브 주입구가 파손되었네?>

  으으 UAE에서는 튜브가 터지더니 이번에는 주입구가 찢어지고. 정말 특이한 펑크만 나는구나. 정비는 불가능할 듯 하여 일단 예비 튜브로 교체하기로 했다.

<주차장 한켠에서 타이어 정비>

  마침내 스플리트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거리에는 즐비한 기념품 가게, 수많은 여행자들. 인파를 헤치며 스플리트 구 시가로 진입했다.

<스플리트 구시가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건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라는 이름의 거리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 야자수와 따뜻한 햇살에 펑크로 언짢았던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구시가 남쪽의 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거리>

  광장 바깥쪽 버스는 관광객들을 쉴새없이 토해내고 있다. 마침 한국 어르신들 한 팀이 보인다. 이 얼마만에 만나는 한국인인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가서 인사드렸다.

  그런데 나를 현지 가이드로 아시네. 여기서 가이드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나? 아무리 그래도 가이드가 짐을 한가득 실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지는 않을텐데.

  헤어지기 전 한 분이 돈을 주셨다. 무려 20유로나 된다. 극구 사양했음에도 노자는 물론, 한국 과자와 사탕 등도 듬뿍 담아주셨다. 성함도 모르지만, 이국 땅에서 한국인의 정을 느끼게 해 주신 어르신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스플리트 항>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한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크로아티아가 그리 대중적인 관광지는 아니었는데, TV프로에 보도되었다니 그래서인가? 이렇게 좋은 곳이니 당연히 방문객들이 많겠지. 한국인들이 많으니 나도 태극기를 달아야겠다. 누군가는 이 먼곳에서 태극기를 보면 조금이나마 즐거워지겠지?

  항구에 연한 광장에는 벤치와 노천 까페가 즐비하며 그 뒤로는 성벽이 보인다. 바로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의 궁전 외벽이다.

  성벽 앞 광장은 까페와 벤치가 즐비하고, 푸른 바다를 갖고있는 멋진 곳이다. 거리에서는 각종 공연이 이어졌다. 공연도 보고,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인 여행자들과 잠시 이야기도 나눈다.

<거리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제 황제의 궁전에 들어가 볼 시간.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어라? 한국 대학생이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구와도 말을 편하게 섞었지만, 경험상 한국 여학생들은 예외다. 우리말이 반가워서 말을 걸어도 길에서 만났을 경우에는 유독 불편해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잘 말을 걸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의외다.

  이윤임 양은 한국 자전거 여행자를 처음 만난다면서 반가워 한다. 알고보니 그동안 혼자서 발칸반도를 여행해온 당찬 아가씨다. 연약해 보이지만 외유내강이랄까, 내가 지나온 곳을 여행했고 게다가 자전거 여행기도 즐겨본다고 한다.

  "오. 자전거 여행기를 구독하다니……. 설마 나?"

  약간의 기대를 했지만 아쉽게도 내건 아니었고, '베가본더'의 팬이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동갑내기 부부가 함께 파미르 고원을 넘고 세계일주 중인 대단한 자전거 여행자다. 사진도 좋고 글도 매우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 때문에 나도 좋아하는 친구다.(베가본더와 아톰의 자전거 세계일주)

  '음. 뭔가 아쉽지만 베가본더라면 팬 할 만 하지.'

<멋진 여행자 이윤임 양>

  마침, 윤임양도 궁전을 돌아보지 않았기에 같이 다니기로 했다. 궁전에 자전거를 끌고가기는 무리겠지?

  Wing은 어쩔 수 없이 적당한 곳에 세워둬야한다. 도심에서는 숙소를 잡지 않으면 사람들을 믿을 수 밖에 없다. 뭐, 밖에 세우는 짐은 대부분 나한테는 요긴하지만 타인에게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 지금까지 발칸반도 사람들은 친절했고 치안도 괜찮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

<노천 까페가 즐비한 거리. Wing은 어디에?>

  스플리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이 궁전의 주인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다. 이 황제는 과거 달마티아(Dalmatia) 속주로 불리던 이 지역 출신이다. 속주 출신이지만 군 경력을 바탕으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당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현했던 5현제 시기가 끝나고, 수많은 군인 황제가 난립하던 위기였다. 그는 혼란을 종식시키고, 각종 개혁을 실시하여 황권을 강화한다. 권위를 세우려면 '적'을 상정하는게 가장 손쉬운 방법일까? 그의 적은 제국 전역에 퍼져나가던 기독교였고, 기존 의사결정기구였던 원로원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이 중, 이 황제의 가장 특이한 개혁은 일명 사두정치다. 300년 전 케사르(Caesar)의 삼두정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 이미 너무나 거대해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동,서방에 각각의 정,부 황제를 두어 권한을 분산했다.

<위풍당당한 기둥이 즐비한 열주 광장(Peristyle)>

  로마의 혼란을 정리한 황제는 또다시 놀라운 결심을 한다. AD 305년 황위를 이양하고 물러난 것이다.

  로마를 떠난 황제는 처음이 아니다. 이전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는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의둔하면서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토록 애써 강화한 황위를 미련없이 내던졌다. 심지어 아들에게 세습하지도 않았다.

<고대와 중세가 공존하는듯한 성 도미니우스 성당>

  많은 피를 흘림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권력의 정점에서 허무함을 느낀 것일까? 그래도 자발적으로 물러난 군주가 세습까지 포기한 것은 드문 일이다.

  신라 진흥왕도 말년 불교에 귀의했다지만 왕위 세습을 포기하지 않았고, 후일 그의 제국 이름을 갖다 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Charles V) 역시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아들과 동생에게 나라를 분할하여 물려주었다.

<열주 광장의 남쪽 돔(vestibule)을 통해 바라보는 하늘>

  로마의 정서에 맞지 않은 전제군주정을 실시한건, 군인황제들의 난립으로 혼란기를 수습하면서 단일화된 지휘계통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로마 본토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제국 개편의 장단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에 올랐던 사람이니 매우 합리적이고 유능한 정치가였을 것이다. 단지 폭군으로 여기기에는 그를 과소평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관광객으로 가득한 황제의 궁전>

  제국을 분할하면서 이미 은퇴를 염두에 두었을수도 있다. 서로 견제하기도 바쁜 4명의 황제들은 실권을 물려준 전 황제를 방해하기에는 명분도, 실리도 부족했을 것이다.

  권력의 버린 황제는 스플리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말년을 알 수 없지만, 이 아름다운 곳에서 편안하게 눈감지 않았을까?

<발가락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레고리우스 닌(Gregorius of Nin)의 동상>

  재미있게도 영어에 '분할하다, 나누다'라는 뜻의 split라는 단어가 있다. 설마 어원이 제국을 분할한 이 황제로부터 비롯된건 아니겠지? 영단어를 고대 황제의 은퇴지에서 찾는건 갖다붙이는건 무리수인가?

  반면 황제의 삶과 별도로 그의 핵심 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는 그가 분할한 제국을 다시 통일했고, 밀라노 칙령(AD 313)을 발표하여 그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박해했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물러난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옆모습이 새겨진 금화>

  재미있게도 역사의 라이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현재 크로아티아 출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르비아 출신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슬라브인의 발칸반도 진출은 훨씬 이후의 일이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티격태격하고있는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이곳을 사랑했던 황제가 되어 이런저런 가정을 해 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황제를 떠올리다>

  한편 기독교를 박해한 그는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게다가 기독교의 복수랄까, 그의 시신은 사라져버리고, 무덤위에는 그가 박해했던 성 도미니우스(St. Domnius)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진다.

<황제 무덤에 말뚝을 박은 듯 보이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 첨탑>

  그러나 성벽으로 둘러싸인 황제의 궁전은 현재까지도 주거지와 각종 레스토랑, 상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호한 보존상태로 보아 크게 함락되거나 전화(戰禍)를 겪지는 않았으리라. 아마 이 궁전은 이후 이어진 이민족의 침입과 발칸반도의 수많은 전쟁에서 주민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1700년의 세월을 견뎌낸 튼튼한 궁전>

  그의 궁전은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아직까지 주민들을 먹여살리고, 수많은 관광객을 즐겁게 하고 있으니 가히 폭군으로 불린 황제의 마지막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 황제의 이 멋진 선물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선물. 스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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