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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25. 노마드 박주하 선생님과의 만남

  4박 5일간 편히 머물렀던 마르코의 집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Bosnia i Hercegovina). 처음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위험하다는 선입견도 있고, 경로 또한 복잡해지기에 생략하려고 생각했다. 얼마 전 BIH에서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한적한 마을 길>

  하지만, 마르코의 집에 함께 묵었던 Jack이 BIH를 추천했다. Jack은 얼마 전 버스로 BIH의 수도 사라예보(Sarajevo)에 다녀왔다. 사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가 크로아티아(Croatia) 본토에서 뚝 떨어져 있기에 어디로 가든 BIH를 경유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크로아티아보다 물가가 저렴하다는 말에 바로 BIH행을 결심했다.

<제초작업 중. 나도 잘하는데 알바 필요없어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가 우중충한게 또다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예상이 맞았다. 한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금세 굵어졌다. 무슨 봄비가 장마빗처럼 쏟아지니 원.

  판초우의를 급히 뒤집어 썼다. 쏟아지는 비는 시야를 가리고, 우의를 뒤집어 쓰니 몸에 금세 열이 오른다. 비를 막아주는 우의는 땀 배출도 막아서 축축한건 마찬가지다.

  '그래, 난 고어텍스가 필요해. 이딴 판초우의가 뭐람?'

  도로에서는 흙이 튀어 바짓가랑이는 금세 더러워진다. 차가 거의 없는 샛길이라 그나마 덜 위험한게 다행이랄까?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급히 자전거를 내려 보니 앞바퀴 펑크. 으으으. 비도 내리는데 펑크를 어디서 때운다?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오, 저기가 좋겠다.

<자전거 정비>

  튼튼한 슈발베 타이어도 장거리에는 재간이 없다. 뒷바퀴가 유독 많이 닳아서 세르비아에서 앞뒤 타이어를 교체했는데 결국 펑크구나. 그래도 정비하기 편한 앞바퀴니 다행이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Ohrid)에서 고친 랙은 또다시 부러졌다. 그래도 조선소에서 만들어 준 지지대 덕분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다. 혹시나 해서 케이블 타이로 여기저기 칭칭 감아놨다.

  튜브를 살펴 보았으나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튜브는 나중에 차분히 손보고 일단 예비튜브로 교체해 버리기로 했다. 비는 내리고 여러모로 처량하다.

  정비를 마치자 날이 개었다. 와. 기가 막히 타이밍이다. 어쨌든 편히 달릴 수 있게 되었구나.

<크로아티아 문양이 새겨진 버스 정류장>

  길은 두브로브니크 방향. 다만 중간에 우측 내륙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지형이라 편하다. 한참 달리다 반대편 해안 쉼터에 자전거 여행자 한 명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길을 건너보니 동양인.

  "Hi, Where are you from?"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인이었다. 와. 자전거 여행자는 여럿 만났지만 한국인을 길에서 이렇게 만난건 처음이다. 인사만 하고 가려 했으나 어느새 자리를 깔고, 차도 한 잔 끓이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바로 박주하 선생님. 발칸 반도와 집시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이쪽을 탐사하신다고 한다. 올해 환갑이지만 여정에 나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동안 산길, 날씨에 툴툴거린게 창피해지는 순간이다. 경로가 반대라 함께 달릴 수는 없지만 지나 온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다.

  박주하 선생님의 여행기는 여기에. http://parkjouha.blog.me/ 발칸 지역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 재미있게도 몬테네그로의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신다.

  (Tip. 한국이 .kr을 사용하듯 .me 주소는 몬테네그로의 국가 도메인입니다.)

  알고보니 박주하 선생님은 노마드라는 필명으로 여러 자전거 여행 동호회에서 매우 유명한 분이었다. 이전에도 자전거 여행 경험도 많았다고 한다. 그건 굳이 말씀하지 않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여행 내공은 짐만 봐도 대충 파악 가능하다.

  장기간 여행이지만 선생님의 짐은 뒷 페니어 두개와 핸들바 가방이 전부다. 무언가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나와는 비교도 안된다.

<노마드 박주하 선생님과 자전거>

  여행에서 배운 깨달음 중 하나.

  장비가 많으면 분명히 편리하다. 하지만 때로는 여행의 편의를 위해 준비한 도구들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때가 많다. 욕심나는건 많지만 모두 짊어질 수는 없다. 실제로 길을 나서보니 이런저런 챙기고 싶었던 것들은 필요 이상의 집착이었다. 자전거에 적재 한 물건만으로도 1년 이상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여행자의 짐은 그의 업보에 비례한다는 인도 속담을 들었다. 법정 스님은 난 화분 하나만으로도 집착을 경험하고 결국 포기했다. 그런 법정 스님이 화분 하나 가꾸지 못할만큼 정서가 메마른, 멋대가기 없는 사람인가? 오히려 버림으로서 자유를 얻지 않았는가? 사람의 내면은 물건으로 포장해도 변하지 않는다. 나도 나름대로 많이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을 보니 나는 한참 멀었다.

  일례로 선생님은 텐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침낭과 타프(그늘막)만으로 비박을 한다. 그래도 불편함 없이 잘 다닌다고 한다. 모든 장비는 꼭 필요한 것 뿐이다. 덕분에 짐에 얽매이지 않는다.

  물론 소형 경량 장비는 비쌀때도 많다. 하지만, 비움과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마음이 없이 돈 만으로는 결코 이런 짐을 꾸릴 수 없다. 편의를 위해 하나 둘씩 더 챙기게 된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하면 끝도 없다.

  나보다 소지품이 적지만 그 와중에도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신다. 비상식량으로 즉석식품을 나눠주셨다. 부족한듯 보이지만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으므로 부족한게 아니라 풍족하다.

<아드리아해 항구를 내려다 보며 대화>

  사람들은 늙기 싫어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한 살이라도 어려보이고 싶어한다. 세월의 흔적을 지우려고 머리에 물을 들이고, 보톡스를 주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제대로 나이들지 못하면 정상이 아니다. 나이들면 나잇값을 해야한다.

  박주하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연세가 아니라 비울 수 있는 마음가짐과 도전하는 열정이었다. 육체적 나이는 깊이있는 정신으로 변했고, 도전하는 정신은 여정을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젊음으로 드러났다. 선생님은 청년이었다. 나보다 훨씬 젊고 멋진. 나는 한참 멀었다.

  물론 나는 선생님과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분의 삶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잠깐의 만남에서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느껴진다. 그 동안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은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슬라브어까지 구사할 수 있어서 발칸 여행에 어려움이 없다. 같은 곳을 지나더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훨씬 깊이있는 여행이 가능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던 중 합류한 노부부. 선생님보다 더 윗 연배다. 멋지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건강하고 멋지게 나이들 수 있을까?

<자전거 여행중인 노부부>

  반가운 만남 중에 금세 시간이 흘렀다. 슬슬 하루를 정리해야 한다. 나는 선생님께 마르코의 집을 추천했고, 선생님은 내게 전날 주무신 캠핑장을 알려 주셨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오늘은 거기서 자야겠다.

  캠핑장이 있는 Kupari를 향해 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한국인은 유럽인들처럼 아무나 보고 쉽게 웃지 않지만, 쉽게 잊지 않는다. 한번 마음을 열면 함께 한 시간에 비해 훨씬 더 깊다. 이게 한국인의 정이고 정서구나. 문득 아무나 따르지 않지만, 한번 주인은 끝까지 따르는 진돗개가 한국인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핑장 도착. 텐트는 52.5쿠나. 방갈로는 100쿠나. 날씨도 불안하고, 선생님의 추천도 있고 해서 방갈로를 선택했다. 마르코 집에서 충전을 못했더니 카메라 배터리마저 간당간당하다. 자전거도 들여다 놓고 콘센트를 가득 채웠다.(주행거리 32.26km, 누적거리 8,916km)

<편안한 통나무집>

  통나무집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숙박을 연장했다. 비가 오지 않을 듯 하여 텐트로 이사했다. 이사 후에는 근처에 해변이 있다고 해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해변으로 향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수영 못한게 아쉬웠는데 여기서 바다를 즐겨야겠다.

<캠핑장 근처 Kupari 해변>

  해변에 들어섰는데 뭔가 억울하다. 이곳은 리조트로 개발하려다 포기했나보다. 짓다 만 호텔이 여럿있었다. 괜히 캠핑장에 텐트쳤잖아?

<아.. 저런 좋은 호텔을 두고 캠핑장이라니>

  조금 쌀쌀하지만 입수. 캠핑장에 묵는게 아깝지 않으려면 더 재밌게 놀아야만 한다. 혼자 헤엄도 치고 물수제비도 떠 보고, 모래성도 쌓아 보지만 그다지 재미없다. 혼자 이러고 놀기에는 너무 머리가 굵어져버렸다.

  '에이 돌아가자. 유료 캠핑장 알차게 보내려면 온수 샤워라도 해야겠다.'

<물개. 너도 심심하냐?>

  캠핑장에 사람은 많았지만 그냥 텐트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캠핑카다. 캠핑장 군데군데 있는 설비는 차량에 전기를 공급한다. 심지어 위성 안테나를 갖춘 캠핑카도 있다. 이렇게 다니면 참 편하겠다.

<위성 안테나를 갖춘 캠핑카>

  캠핑카는 움직이는 집 자체다. 차 안에 침실과 주방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주차하면 무언가 끝도 없이 나온다. 테이블을 설치하고 안락의자를 펼치고, 바닥이 그리우면 보조 텐트를 쳐도 된다. TV 시청도 한다. 뒤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실려 있다. 자연을 즐기면서도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는 오토 캠프>

  글쎄, 신기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캠핑카가 크게 부럽지 않다. 나도 있을 건 다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닌가 보다. 캠핑카를 몰로 온 오스트리아 영감님도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부족함이 없는 영감님은 오히려 내 여행이 부럽다고 한다.

<집을 몰로 온 오스트리아 영감님>

  박주하 선생님의 이야기와 노부부 사진을 보여드렸다.

  "왜? 뭐가 부러운데? 원하면 너도 할 수 있어. 힘들면 거리를 줄이고 자주 쉬면 돼. 한국의 어르신도, 유럽 노부부도 하시더라. 해 보면 건강에도 좋고 살도 많이 빠질거야."

  내친 김에 내 텐트 자랑도. 7성급 텐트 알 아랍이라는데 이건 별로 안부러워 하는듯.

<7성급 텐트 알 아랍의 위용>

  이제 진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향하여. Kupari는 위치도 절묘하다. 두브로브니크와 BIH 갈림길에 있는 마을이다. BIH를 향해 우회전.

<갈림길. BIH는 우회전><우회전 하니 슬슬 오르막길 등장>

  캠핑카도 부럽지 않다면서 의기양양하게 출발했지만 간사한 마음은 오르막길에서 금방 바뀌었다. 힘들다. 비올때는 맑은 날을 기다렸으나 정작 햇볕이 내려쬐니 너무 덥다. 차에 에어컨 틀어놓고 악셀 밟으면 금방인데……. 정말 갈대가 따로 없다.

<언덕에서 만난 스위스 자전거팀><힘내자, 하나 둘 하나 둘>

  얼마나 올랐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크로아티아와 아드리아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반대쪽의 바위산은 BIH 영토. 앞에 작은 주유소가 하나 있네.

<크로아티아 월경지를 내려다 보며>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가야지 조금만 힘내자.'

  알고보니 주유소가 아니라 검문소였다. 이런 허술한 국경이라니.

<허름한 크로아티아 국경>

  이걸로 짧았던 크로아티아 1차 여행 끝! 그나저나 그늘에서 좀 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계속 가야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향하여!

<국경 앞. 개나리는 아닌데. 이름 모를 노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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