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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IH)

127. 공동묘지 곁의 하룻밤

  트레비녜(Trebinje)를 떠나자 계속해서 산길이 이어진다. 마을은 거의 없다. 나라에 비해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것 같다. 전쟁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시골이라 그런 것일까?

<트레비녜 외곽 마을>

  주위에 보이는 산은 주로 바위산이다. 그 바위 틈 사이로는 작은 풀부터 나무까지 자라고 있었다. 경사가 험한건 아니지만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니 금세 지친다. 그래도 이정도 도로가 있는것에 대해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산허리를 따라 계속되는 오르막길>

  달리다 보니 바위도 모양이 다 다르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바위가 겹겹이 쌓인 협곡이었다.

  어쩐지 삼국지의 손견이 죽은 골짜기가 이런 곳이 아닐까 싶은 곳이다. 괜시리 매복이 있을까 주위를 돌아본다.

<돌 굴러가유~>

  출발한지 20km가량 지났을까? 큰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둘레를 따라 10km 이상 달렸으나 호수는 끝날줄을 모른다.

  지도를 확인하니 Bileća 호수로 몬테네그로 국경을 끼고 있는 호수다. 호숫가에 탁자가 설치되어 있길래 여기서 중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 곳이므로 지뢰따위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Bileća 호수에서 잠시 휴식>

  탁자 근처에는 ㄱ자로 꺾어진 깃대에 세르비아 국기가 걸려있다. 깃대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바람을 타고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여기는 바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안의 작은 세르비아. 스릅스카 공화국(Srpska Republic)이다.

  스릅스카 공화국을 마음껏 느끼며 잠시 오침도 취하고 기력 회복 완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물스물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동쪽의 저 불길한 기운은 뭐지?>

  설마 또 비가 오려나? 바람도 거세지더니 금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도로를 차단한 먹구름>

  숙영지를 찾으려니 골치아프다. 그동안 좋은 휴식처가 되어주던 빈 집은 기대할 수도 없고, 도로 바깥쪽에는 지뢰 경고가 붙어있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마침 길가에 식당이 보인다.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식당 맞은편 주차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강풍을 대비하여 지주핀도 단단히 박고 숙영준비 완료.(Korita 주행거리 54.31km, 누적거리 9,013km)

<주차장 한켠에서 숙영>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부득이하게 머물게 되었으나 좋은 선택이었다. 물티슈로 대충 닦는 대신 화장실에서 제대로 씻을 수 있었으며, 충전도 했다. 잠자기 전까지 식탁에서 이런저런 기록도 정리할 수 있었다.

  예정에 없던 식비가 들기는 했지만, 편히 쉰 걸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이다.

<석식 메뉴는 Ćevapi(체바피) 발칸 반도에서 흔한 음식>

  밤중에 비가 계속 내리는 듯 했으나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다행히 날이 개어 있었다. 컨디션도 좋고 그동안 얼마 달리지 못했으니 오늘은 마음껏 달려봐야겠다.

<작은 정교회식 성당>

  열심히 페달을 밟는데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는다. 이유는 산 때문.

  몇 시간이 지나자 비로소 1,000고지를 넘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바위산을 오르자 산마루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계속되는 바위산과 낙석주의 표지판>

  초원에는 듬성듬성 집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황량하다. 멀리 방공호인지 탄약고인지 모를 콘크리트 덩어리가 보여 쓸쓸한 느낌을 더한다.

<저건 설마 탄약고?>

  게다가 계속 가물었는지 바닥은 꽤나 메말라 보인다. 가만, 당장 어제도 비가 왔는데?

<황량한 산 위의 풍경>

  멀리 보이는 산은 설산이다. 5월인데 아직도 눈이 남아있다니. 딱 1년 전 나는 안나푸르나의 설산에 있었는데…….

  한동안 넋놓고 설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아직도 눈이 남아있는 산>

  조금 더 달리니 쓸쓸하던 풍경은 안정적으로 바뀐다. 넓은 들, 저수지, 목장 등이 이어진다. 여기 1,000m가 넘는 곳인데 계단식 논밭이 아닌, 수 km에 걸친 평야가 보이니 높은 줄도 모르겠다. 농작물도 고랭지 작물은 아닌것 같다.

<저수지도 있고>

  얼마 후 Gacko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개츠코 입장을 환영하는 농부아저씨>

  이름이 Gacko가 뭐야? 개코같은 동네가 다 있네. 하지만 '개코'를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알고보니 개츠코. C의 발음은 츠에 가깝다.

<키릴(Cyrillic)로 쓰여진 개츠코 입간판>

  도시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라 마을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개츠코는 제법 규모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 편안한 곳이었다. 상당히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분지처럼 산으로 포근히 둘러싸인 지형,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양. 친절한 사람들의 응원은 전쟁으로 점철된 BiH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에 충분했다.

<붉은 색으로 통일한 개츠코 주택><한가로이 풀을 뜯는 중>

  삭막할 거라고 생각했던 BiH가 이렇게 평온한 곳이었다니……. 개츠코의 분위기에 반해 한참을 머무르다 다시 출발한다.

<오솔길 주변 개츠코 목장>

  쉴때는 개츠코를 포근히 감싸주던 산이 출발하니 장애물로 변해버렸다. 200여 m를 더 올라가고서야 산길은 나를 놓아주었다.

<언덕 위에서 내려보는 개츠코><산 위에 소가 막 돌아다니네?>

  옆에는 Drina라는 강이 나타났다. 이 강은 세르비아까지 이어지는 긴 강이다. 강가를 따라 달리는데 이번에는 시원한 내리막이다. 내리막길은 약 20km에 달했지만 내려오는건 금방이다. 고도는 다시 300m 정도. 어떻게 올라간 길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내려오다니.

  다시 오르막이 시작될 무렵 Sutjeska 국립 공원이 나타났다.

<드리나 강을 따라서><수체스카 국립 공원 시작>

  Sutjeska 국립 공원은 길이가 거의 10km에 달하며 뾰족뾰족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멋진 공원이었다. 길은 험했지만 중간중간 터널이 있어서 다닐 만했다. 터널없이 저 산을 다 넘어야 했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한숨부터 나온다.

<그래도 터널이 있어 다행이다>

  잠시 쉬며 물을 마시려고 보니 물이 거의 없다. 어라? 왜 이정도가 되도록 물을 안채웠지?

  그러고 보니 Gacko부터 거의 40km이 되도록 상점이나 마을은 물론 주유소 하나 없었다. 국립공원 때문일까? 도로는 잘 닦여 있었지만 인적도 드물고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는 길이었다.

  지도를 보니 조금 더 가면 Tjentište라는 마을이 나오고 이후에는 또 20여 km동안 마을이 없다. 어떻게든 Tjentište에서 물을 구해야겠다.

<절벽 위 낙락장송의 곧은 절개>

  그런데 막상 Tjentište에 도착하니 빈 집 몇채만 있을 뿐 가게는 모조리 문이 닫혀 있었다. 어라? 그럼 물을 어디서 구하지?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하나? 이거야 원. 

  게다가 다시 경사가 심해진다. 낑낑거리며 800m가 넘는 언덕에 올라서니 작은 정자가 하나 보인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BiH에서는 지뢰 때문에 함부로 수풀에 들어갈 수 없다. 다행히 정자에 인계철선은 안보이네. 여기 정자에서 자면 딱 좋겠다. 더 어두워지면 숙영지를 찾기도 힘들고 위험할 것이다. 그런데 물이 없으니 오늘은 아무것도 못먹겠구나. 어쨌든 짐부터 풀고 보자.

<소나무밭도 좋아보이지만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차 한대가 지나간다. 속으로 '제발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갈 길 가세요'라고 외쳤으나 차는 곧 멈춰서더니 문이 열린다. '뭐야? 정자 주인인가? 귀찮게 되었네'

  차에서는 부부가 내리더니 짐 내리는 것을 보며 무슨 일인지 묻는다. 자전거에 문제가 생긴줄로 안 것이다.

  '빨리 가야 편하게 텐트를 칠텐데'

  타이어 체크하는 중이라고 둘러대고 애꿎은 Wing의 페달만 돌리고 있는데 부부는 도무지 갈 생각을 안한다. 어쩔 수 없다. 정면승부 해야지.

<갑자기 나타난 자동차의 부부>

  "Foća로 가는 중인데 날이 저물어서 여기서 자도 될까요?"

  그러자 돌아온 답변은 바로 옆이 공동묘지라서 안좋다는 것이다.

  '흠. 어쨌든 자도 된다는 뜻이군. 공동묘지라. 그럼 밤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겠네. 잘 되었다. 만약 귀신 나오면 물이나 좀 떠오라고 해야겠다.'

<다음날 확인해 보니 비석 여럿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귀신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텐트 치는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혹시 물 필요하지 않냐면서 생수 한 병을 주셨다. 뚜껑도 열지 않은 새거다. 물이 없는걸 어떻게 아시고? 귀신같이 알아차리셨네?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운 부부 덕분에 더 이상 목마르지 않다! 생수로 밥 지어 기력도 보충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Tjentište 8km 후방 정자, 주행거리 65.38km, 누적거리 9,078km)

<공동묘지 곁의 정자에서 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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