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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2. 우주여행자를 만나다.

  2011년부터 자전거 한 대에 몸을 싣고 4년째 여행 중. 거쳐온 길에는 치안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포함하고 있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위험하다는 길은 모조리 거쳐온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혼자 다니고 있으며 그것도 여성이다.

  그녀를 온라인으로 알게 되고, 과연 어떤 사람인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마침 내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i Hercegovina; BiH)에 머물 때 그녀는 크로아티아(Croatia)에 있었다. 이후 BiH로 갈 계획.

  아쉽게도 지금까지 대부분 여행자들이 그랬던것처럼 나와는 반대방향이다. 함께 달릴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

  트로기르(Trogir) 근처에서 마지막 교신을 하며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서 정오 즈음에 59번국도로 빠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멋진 여성과의 만남을 앞두고 첫 약속에 늦어버리는 꼴이라니. 어디 이 따위 매너가 다 있나? 더 빨리 출발할걸…….'

  때늦은 자책을 하는데 마침 주차장 한켠에 노란색으로 독특하게 도색한 자전거 – 럭키(Lucky)가 눈에 들어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럭키와 새파란 후배 Wing - 우주여행자 作>

  드디어 만나게 된 '우주여행자' 정효진양.(우주여행자의 지구별 자전거 여행에서 한글/영문으로 작성된 그동안의 엄청난 여행기와 프로수준의 사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침 근처에 까페가 있어 차나 한잔 마시러 들어갔다. 우주여행자는 오랜 기간 자전거 여행을 해 왔지만,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를 만난건 처음이라고 한다. 나 역시 온라인으로 알던 유명인을 직접 만난건 처음이라 연예인 만나는 기분이었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우주여행자 정효진양>

  영국에 머물다 얼마 전 귀국한 달마에게 Wi-fi를 통해 자랑도 했다.

  하지만 둘 다 자전거여행자 아니랄까봐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전원 콘센트부터 찾는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주고받며, 또 경로가 엇갈리기에 향후 정보도 묻다보니 몇시간이 금세 흘렀다. 이제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

  우주여행자에게 멋진 선물을 받았다. 바로 그동안 사용하던 크로아티아 전도. 오 드디어 전자책의 자그마한 화면이 아닌, 제대로된 지도를 보는구나.

<핸들바에 지도 장착>

  또, 내 투어링 캔버스에 '같은편 자전거 여행가'라는 응원문구를 적어주었고, 마지막으로 함께 기념촬영까지 마치고 각자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우주여행자는 BiH를 향해 내륙으로 떠났고 나는 계속 8번 국도를 타고 북쪽의 해안도시 자다르(Zadar)를 들렀다가 플리트비체(Plitvička)로 갈 계획이다.

<우주여행자와 함께 기념촬영 - 우주여행자 作>

  마침 지도도 생겼겠다 출발하기 전 길을 다시 확인한다.

  '어라? 플리트비체 가는 다른 길도 있네? 음. 어차피 목적지는 플리트비체고 자다르는 경로일 뿐이다. 굳이 자다르로 가는게 의미가 있을까?'

  이미 바다는 많이 봤고, 자다르도 두브로브니크(Dubrovnik)나 스플리트(Split), 트로기르와 대동소이 할 듯 하다. 내륙으로 가면 산을 조금 만날테지만 함께 달리는게 더 즐거울 것 같다.

<이 길이 더 나을까?>

  결국 경로를 변경하기로 했다. 먼저 출발한지 꽤 지났는데?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달려야겠다. 뭐 길은 하나니까.

<잘 닦인 신작로를 타고>

  한참을 달려 우주여행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흠칫 놀라는 눈치다. 그럴 만도 하지. 한시간 전에 헤어진 사람이 다시 나타났으니.

<조금만 더 가면 따라잡겠구나>

  오랜만에 동행이 생기니 산을 넘기도 수월하다. 예전 카르파티안 산맥을 넘을때도 달마가 없었으면 훨씬 힘들었겠지? 달마와 함께 루마니아를 누비던 생각도 나고 좋다.

  물론 주행스타일은 다르다. 예전 민규형님과 처음 함께할때는 속도차이로 힘들었다. 하지만 달마, Pavel과 같이 달리면서 나름대로 함께 달리는 요령이 생겼다.

<이런 길에서 50km/h 초과할 일은 없으니 - 우주여행자 作>

  크로아티아는 해변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산지도 그에 못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너른 들판>

  하지만 BiH 국경 근처라 그런가 여기에도 지뢰(Land mine)가 제법 묻혀있나보다. 두고두고 주민들을 괴롭히고 제거하기조차 쉽지않은 지뢰는 정말 골칫덩이다.

<다시 나타난 지뢰표지판>

  그래도 쉬엄 쉬엄 즐겁게 달린다. 우주여행자와 함께 달리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발칸반도 사람들이 친절했지만 나 혼자 다닐때나 달마와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호의적이다. 물론 여성여행자로서 애로사항이 더 많겠지만 이건 분명 재미있는 변화다.

  하긴, 같이 다니는 나도 신기한데,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질까?

<신나게 주행 중 - 우주여행자 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 쉬다 반복한 끝에 슬슬 하루를 정리할 시간. 어디에서 자야 하나? 호스텔 따위는 없는 곳이다. 내색은 안했지만 함부로 야영하기도 그렇고 신경이 쓰이는게 사실이다. 그때 마침 Đevrske라는 마을을 5km가량 남겨두고 빈 집이 보였다. 오호라.

  우주여행자는 탐탁치 않은 눈치였으나, 내 생각에는 괜찮아 보였다. 더 이상 서있을 수 없는 Wing을 맡겨두고 혼자 지형정찰을 위해 빈 집에 들어섰다.

  일단 전쟁이후에 지어진 집으로 보이니 부비트랩은 없을거고, 현재 공사하고 있는 흔적도 없다. 마을도 멀고 통행량도 적은데다 바닥에 깨진 빈병도 없으니 동네 불량청소년들의 놀이터도 아닐 것이다. 안쪽 방은 도로쪽에서 전혀 보이지 않고, 진입로에는 풀이 무성하다. 최적의 숙영지다.

<빈집 지형정찰 완료>

  스탠드가 부려져서 짐 풀기도 불편하네. 일단 텐트부터 치고 보자.(주행거리 82.8km, 누적거리 9,737km)

  아까부터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했는데 알고보니 우주여행자는 와일드 캠핑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대신, 경찰이나 믿을만한 집에 양해를 구하고 마당 등에 텐트를 쳐왔다고 한다. 이건 매우 현명한 태도다. 스스로를 위험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맡겨버리는건 어리석은 일이니까. 그래서 더 어려운 경로를 다니면서도 지금까지 안전하게 다녀왔나보다.

  반면, 나는 거절당하기도 싫고 묻기도 귀찮아서 그냥 엄폐물을 찾는게 더 익숙하다.

<숙영지 편성>

  그리고, 드디어 저녁시간. 우주여행자는 어렵게 구한 한국음식을 갖고 있었다. 우와, 그렇게도 그리웠던 된장찌개 등장. 게다가 그 귀한 된장과 고추장까지 듬뿍 덜어주었다.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는 안되는데…….

  밥은 내가 했는데 훌륭하게 설익었다. 으으 그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왜 오늘따라? 개망신. 타이밍 한번 기가막힌다. 원래 안그랬다고 둘러대지만 안믿는 듯 했다.

<된장국, 호박 볶음, 설익은 밥 빼고는 진수성찬>

  식사 후, 그리고 다음날 함께 달리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의 여행도 대단했지만 가장 인상깊은건 '정직한' 여행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저경비 여행을 다닌 사람들을 만나면 간혹 안좋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무임승차를 한다거나 금지된 곳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등 해당국가의 규정을 무시하는 경우, 또는 입장료를 내지 않고 담을 넘는다던가. 각종 할인혜택을 받기 위해 국제학생증이 필요한데, 학생이 아니라도 가짜로 만들어 주는 곳 따위의 이야기가 정보랍시고 많이 돌아다닌다.

<이름모를 진짜 '무료' 유적지>

  그런데 우주여행자는 4년이나 길을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그런 반칙의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 온 것이다. 이런 태도였기에 어디서나 환영받으면서 잘 다녀왔으리라.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지만 배울 점도 많고 생각도 깊었다. 여행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을 옆에서 보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음. 그런데 나는 뭐가 달라졌지?

<날씨도 좋고 경치좋은 크로아티아>

  내 경로를 비추어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특히 네팔에서. 흥정할 때는 있으나 없으나 큰 차이없는 몇루피도 손해보지 않으려 했다. 산에서는 몇백원 하는 생수조차 사지 않으려 시냇물에 정수제 넣어 마셨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생수는 누군가가 직접 짊어지고 해발 3,000m를 오른 것이다. 그 정당한 노력과 수고를 그런 헐값에 사 줄 생각조차 하지못한 내가 졸렬해보였다.(단, 기본적으로 흥정을 염두에 두고 10배 이상으로 가격을 부풀려 부르는 인도의 일부 상인들은 예외다.)

<음, 저기서 물을 빼먹을까보다>

  자전거 여행 선배를 만나 많이 배웠다.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배웠다. 나도 이제는 새로운 태도로 사람을 대하여야겠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달리게 되어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이틀간의 동행은 1번 국도에 들어서면서 금세 끝났다. 이제는 진짜로 헤어져야 한다. 같은 도로이지만 방향은 다르다. 우주여행자는 동쪽, 나는 북쪽으로.

<헤어지는 갈래길>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로 접어들었다.(우주여행자의 동행기는 여기 후반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우주여행자님, 만나서 함께 달리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남은 여행기간도 안전하게 다니시길 바랍니다.

<늘 안전히 다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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