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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4. 플리트비체 마라톤 - 크로아티아 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다니

  애당초 플리트비체(Plitvička)는 예정에 없었다.

  꼭 가보라는 추천을 많이 받았지만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6월 성인기준 110쿠나 약 23,000원) 입장료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저렴한 숙소도 없다. 폭포는 Kravice에서 보았으니 그걸로 만족할 셈이었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비로 발이 묶여있던 중, 플리트비체 마라톤을 알게 되었다. 올해로 29회째인 유서깊은 대회다.

<플리트비체 마라톤 출발선에서>

  하프코스 참가비는 120쿠나(약 25,000원). 플리트비체 호수공원 입장권은 물론이고 기념 메달 및 티셔츠, 경기 전날 파스타 파티와 경기 후 중식까지 제공한다.

  이정도면 거저나 다름없다. 경기가 6월 1일이니 일정을 잘 잡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참가신청을 하려 했으나, 이미 접수기간은 열흘이나 지나있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혹시나 해서 주최측에 짧은 영어로 메일을 보냈다.

  "한국은 아마추어 마라톤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으며, 최근 한국인의 크로아티아와 플리트비체 방문이 늘고 있다. 하지만, 플리트비체 마라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나도 이제야 정보를 들었다.

  늦은건 알고 있지만, 한국인이 마라톤에 참가하고, 이 경험을 주위에 알린다면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이다. 이건 주최측에도 득이 될 것이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다행히 특별히 추가접수를 허용해 주어 참가가 가능하게 되었고, 마라톤을 알리겠다고 했으니 반년이 지나서야 약속을 지키는 셈이다.(Tip. 제 30회 플리트비체 마라톤은 15년 6월 7일 예정입니다.)

<주최측에서 보내 준 답변>

  허락은 받았으나 결제과정이 쉽지 않았다. 외국 사이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카드로 결제하려니 온갖 보안프로그램과 인증을 요구한다. 가뜩이나 느린 인터넷과 저사양 넷북으로 감당히기 무리다. 재부팅도 해보고 백신도 돌려보며 수차례 시도를 해도 묵묵부답. 직접 결제시에는 카드 서명과 본인확인도 안하면서, 온라인에서만 이 무슨 난리인지?

  다 때려치겠다는 충동이 머리끝까지 올라온다. 결국 영문 페이지에서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크로아티아어 페이지에서 결제하여 완료할 수 있었다. 에휴, 어떻게 마라톤 뛰는것보다 결제가 더 힘든거냐?

<참가자 명단 난 1098번>

  Mukinje Sports Centre Gym에서 등록하고 파스타 파티 쿠폰도 손에 넣었다. 오랜만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

<파스타 한그릇 추가요>

  한달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비록 풀코스는 아니지만, 퇴원 이후 달리는 최장거리 코스. 그동안 자전거 여행은 재활훈련을 겸한 목적도 있으니, 이 코스를 완주한다면 어느정도 회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참, 달리기 전에 머리부터 어떻게 해보자. 캠핑장에서 면도기로 대충 이발했다. 거울 속에는 해괴한 머리모양의 산적 하나가 서 있었다.

  밤새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도 이따금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도 스타트 라인은 전 세계의 동호인들로 도무지 발디딜 틈이 없다. 뒤에서 대충 몸을 풀어본다.

<출발 준비>

  경기진행이 한국과 다른점은 페이스메이커를 운용하지 않는 것이다. 상관없다. 내 목적은 완주일 뿐 절대로 기록에 욕심내지 말자 다시한번 다짐한다. 그동안의 재활훈련에 대한 최종 평가시험을 치르는 기분이다.

  비록 날씨는 흐리지만 주변 경치는 더없이 아름답다. 길가에서는 크로아티아 민속공연을 하며 주자들을 격려하고 있어 볼거리도 많다. 가끔씩 한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말로 응원을 해 주셔서 더욱 신난다.

<빙글빙글 춤추며 응원하기>

  슬슬 속도에 따라 그룹이 나뉘어진다. 다시 마음껏 달릴 수 있다니. 그것도 이 아름다운 곳에서 전 세계 주자들과 함께! 한껏 고무된 마음은 자제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다른 주자들을 보니 쓸데없는 경쟁심이 발동한다. 서서히 속도를 올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달릴만 했는데>

  너무 무리한걸까? 9km를 지나면서 왼쪽 다리의 느낌이 좋지않다. 음. 천천히 뛰어야 하나? 49분에 10km를 통과. 예전같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대로 딱 한시간만 버티면 되는데…….

  속도를 줄이니 한명 두명 나를 앞질러간다. 속도를 내고 다시 줄이기를 반복하며 17km를 통과했다. 갑자기 왼발에 통증이 더 심해진다.

  으으. 간신히 한발한발 내딛는다. 속도를 줄이니 숨도 차지 않는다. 더 달릴 수 있는데 대체 왜 벌써? 억울하다.

<물 드세요~>

  19km. 이제 통증이 더욱 심해져서 발을 딛기조차 힘들다. 걷는것보다 느리더라도 절대 걷지는 말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단 2km 남았을 뿐인데…….

  이를 악문다. 쩔뚝쩔뚝. 한걸음 한걸음마다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비명소리를 묻어버리기 위해 기합을 넣는다.

  "아아악~."

  쳇 달리지도 못하면서 시끄럽기는. 정말이지 누가 들으면 우승하고 포효하는줄 알겠다. 쓴웃음이 나온다.

<다리위에서 응원해 주시는 관광객>

  한국인들이 응원까지 해주시는데, 해병대 티셔츠가 부끄러워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군가를 틀었다.

  "라이 라이 라이 라이 차차차~"

  군가를 따라부르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통증이 너무 심하다. 낙오는 절대 안돼! 의지가 아닌 오직 오기로 달린다.

  그 와중에 나를 앞지르는 다른 주자들을 보니 속이 쓰리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는데…….

  파란색 배번. 5km 레이스는 이미 시상식까지 끝났나보다. 트로피를 들고 웃음을 지으며 걸어나오는 사람들이 힘내라고 외친다. 분명 응원해주는건데 괜시리 심술이 난다.

  아니, 꼴보기 싫은건 먼저 끝낸 사람들이 아니라 이 정도도 못뛰는 내 자신이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구나>

  마침내 골인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만 더!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으며 마지막 스퍼트를 시도한다.

  "이야아아아악~."

  왼발이 땅에 닿을때마다 후벼파는 기분이다. 귓가에 Congratulation! 소리가 울리자 그대로 바닥에 뒹굴었다.

  고통스럽던 2km가 드디어 끝났다. 해냈다. 진행요원이 무슨일이냐고 묻는다. 약한모습을 보이기 싫다. 억지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I'm OK. Just hungry!"(나 괜찮아. 그냥 배고파서 그래!)

<해냈다. 해괴한 헤어스타일과 검게 탄 얼굴>

  마라톤보다 더 힘들게 의무실로 향했다. 예쁜 간호사가 맞아주었다. 그런데 스프레이는 고사하고 파스하나 없다. 진통제를 물어보니 돌아온 대답은 Only injection!

  팔을 내밀었더니 엎드리라고 한다.

  '젠장. 크로아티아 미녀 앞에서 엉덩이나 까다니.'

<행사본부와 의무실이 있는 체육관>

  다행히 효과가 있어 조금 움직일만 하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 2시간 2분. 처참하다. 입원 전보다 17분이나 느려졌다.

<결과기록지. 쳇 100등이라니. 전체 408등>

  잠시 후 배번 1번 주자가 뛰어들어온다. 풀코스 여자부 1등. 내 기록과 얼마 차이도 없는데 그다지 힘든 기색도 없다. 내가 정말 느렸구나. 이 속도에 주사까지 맞아야 하다니. 비참하다.

  그런데 군살하나 없는 1등의 몸매는 기가막혔다. 와!

<여유있는 차 한잔. 장거리에 최적화된 몸매>

  "1번이 1등한거 봤어?" 데스크에 물어보니 케냐의 Jepkurui로 직업이 Prize hunter라고 한다. Prize hunter? 상금 사냥꾼? 표현이 재미있다.

  알고보니 케냐에서 온 7명이 하프 남자 1~3등, 풀코스 남자 우승, 7등, 여자 1~2등을 했다. 상금 사냥꾼 전문팀인 듯. 그러고 보니 케냐가 마라톤 강국이라는게 새삼스레 떠올랐다.

<2시간 53분 상금과는 거리가 먼 거의 마지막 주자>

  각종 아마추어 대회에서 상금을 휩쓰는가보다. 뭐 골프투어 상금레이스와 비슷하겠지만 마라톤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게 낯설게 느껴졌다.

  음. 달리기를 잘하면 마라톤 상금만으로도 세계일주 할 수도 있겠다.(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라 불가능. 누군가 시도해본다면 재미있겠다.)

<아무리 아파도 무료 식사를 거를수는 없다>

  자비로는 절대 안갈 Poljana 레스토랑에서 중식을 마치고 자전거에 실려 간신히 돌아왔다. 텐트 알 아랍에 드러누워 테라코타 기념메달을 만지작거린다.

<완주 기념메달. 이발을 다시하고 머리가 좀 안정되었다>

  '상태가 악화되면 어쩌지? 병원에 가봐야 하나? 이거야 원 전형적인 소탐대실이구나.'

  '그러나저러나 난 이제 고작 21km도 진통제 없이는 못뛰는건가?'

  '에휴. 목표는 안전한 완주였을 뿐이었는데 욕심부렸더니 이모양이구나. 주제넘는 쓸데없는 경쟁심이라니.'

  '초심을 지켰다면 괜찮았겠지? 혹시 그래도 힘들었을까?'

<크로아티아의 별헤는 밤>

  신나고도 괴로웠던 잊지 못할 플리트비체 마라톤. 경기는 끝났지만 복잡한 머릿속은 다시 플리트비체를 달리고 있다.

<플리트비체 마라톤 주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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