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거쳐왔지만 특히 세르비아는 우리나라에 많은 교훈을 준다.
호스텔에서 세르비아인 Mostafa Naser 일행을 만났다. 이 친구들은 니쉬에 출장온 교통시스템 엔지니어로, 이들에게 세르비아의 역사를 들었고 많은 토의를 했다.
<호스텔에서 Naser일행과 함께>
이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약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차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이라는 긴 이름으로 독립했고, 이후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Kingdom of Yugoslavia)으로 변경한다.
왕국은 2차대전을 겪으며 추축국에 점령당한다. 이때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빨치산 활동을 하며 나치에 맞섰고,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The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을 구성한다. 이 나라가 바로 88올림픽에 참가했던 구 동구권의 유고슬라비아다.
국호의 유고는 남쪽이라는 뜻이므로 유고슬라비아는 즉 남 슬라브국이다. 음, 북 슬라브국은 아마 러시아?
<사회주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무채색 아파트>
유고슬라비아(Former Yugoslavia)는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하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의 6개국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크게 보면 모두 슬라브인이지만 도처에 갈등의 요소가 있었다.
연방을 구성하는 민족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이었고 여기에 알바니아인도 끼어 있었다. 사용하는 언어는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가 혼용되었고(사투리 정도 수준인듯 하다) 문자도 로마 알파벳과 키릴을 동시에 사용한다.
종교는 기존 정교회(Orthodox)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을 받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는 가톨릭 세력이 대다수였고,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교도 들어와 있었다.
<니쉬의 정교회 성당 Saborna Crkva(The Orthodox Cathedral) 세르비아 독립기념성당이다>
그런데 민족과 종교 갈등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의 유학(성리학)자들은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면서 단발령을 거부하고 이후 의병활동을 벌였다. 호국불교로 대표되는 불교는 대 몽골 전쟁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외세에 맞선 선봉이었고, 개화기 들어온 기독교나 동학 등 민족종교 역시 항일투쟁의 한 축이었다. 이런 상황하에 강요된 신사참배가 정치적 문제로 확대된것과 같다.
세르비아인에게 정교회는 독립 투쟁을 이끌어 온 민족 자존심이었다. 어쩌면 이들이 보기에 무슬림은 정복자와 타협한 민족 배반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친오스만파, 친오스트리아파로 치부하며 척결하기에는 외세의 기간이 너무 길었다.
패탱정권이 단 5년 유지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모두 처단했지만, 35년 통치를 받은 대한민국에서는 친일파를 모두 청산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일부 독립운동가조차 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배에 지쳐 변절했으니까…….
그럼 400년동안 지배받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가능했을까? 어느새 이슬람과 가톨릭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해버렸다. 게다가 종교의 분포는 민족과 지역별로 너무 선명했다. 마치 종교가 자신의 정체성인 마냥…….
<세르비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정교회 성당>
Naser에게 크로아티아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들었다. 유태인의 고난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세르비아인 역시 2차대전을 겪으며 약 70만명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학살은 같은 슬라브족인 우스타샤(Ustasa)라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해 봤다.
일본이 물러가자 내재된 갈등이 터졌다. 한때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이념차이로 대립하는 것이다. 물론 포용 시도는 있었으나 결국 나라가 분단되고 얼마 후 남침을 겪었다.
새로 독립한 유고슬라비아왕국에서 비슷한 대립이 있지 않았을까?
끝까지 신념을 지킨 정교도(주로 세르비아)의 눈에는 한때는 비록 오스만에 함께 맞섰지만 오스트리아를 등에 업은 가톨릭 신자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얼마 전 1차대전은 대 오스트리아전이었다.
반면 가톨릭 세력은 심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무슬림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볼때 우스타샤의 활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것만은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꼭 나치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게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 지도자 티토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크로아티아 출신이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민족간 반목을 해소했을까?
바로 융합정책이었다. 지역의 경계를 허물고 민족을 섞었다. 인간개조의 용광로를 운영한 것이다. 여러 민족이 하나의 남슬라브 민족으로 재편되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지도하에 마침내 과거의 적 또는 배신자들도 이웃사촌이 되었다.
물론 분리주의자들과 반대파들도 있었으나, 이들은 아드리아해의 Goli Otok라는 섬으로 추방해버렸다.
티토 당시에는 이 정책이 성공한 듯 했다. 지금도 세르비아인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티토는 위대한(Genius) 지도자였다고 한다. 공산국가였지만 소련과 맞서 주권을 지켜내며서 이념을 뛰어넘어 제3 세계는 물론, 자유진영과도 교류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안정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했다고 한다.
<즐겁게 일하는 모습. 케이블 설치 작업중>
하지만, 완전한 융화가 되기에 동거기간은 너무나 짧았고 이는 오히려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티토 사후, 채 10년이 안되어 연방은 와해되었다. 먼저 가톨릭 국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선언(1991)이 이어지고, 독립에 반대하던 이웃사촌은 적이 되어버렸다. 바야흐로 참혹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한 것이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연방군을 투입한다. 대 슬로베니아, 대 크로아티아 전쟁이 일어났고 북쪽에 전력이 집중되자 이내 남쪽의 마케도니아도 독립을 선언한다.
3:1로 싸울수는 없으므로 한쪽에 집중하는데 그 대상은 바로 크로아티아였다. 세르비아가 주축인 연방군은 아마 과거의 원한은 물론이고,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 독립의 반감까지 크로아티아에 투사했을 것이다.
<두고두고 전장이 될 것을 예측한걸까? 마치 유개호를 연상시키는 2~4세기 아치형 건물. Tvrđava에서>
결국 3개국이 독립하였지만 아직도 평화는 멀었다. 곧이어 보스니아 내전(1992)이 일어난다.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상황은 크로아티아인이 대다수인 크로아티아와는 달랐다. 보스니아에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그리고 무슬림 집단이 고루 섞여있었다.
내전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지역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갈등으로 시작되었으나, 연방을 유지하려는 세르비아와 새로 독립한 크로아티아가 개입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한국전쟁 당시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산군의 통제하에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듯이, 옆집 가족이 적이되고 아예 피아 구분조차 안되는 잔혹한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민족간의 대립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로 이어지고 이에 국제사회가 개입하여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가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을 결성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지켜나간다.
<니쉬의 해방자 상 The monument to liberators of Nis>
그런데 아직도 피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의 한 지방이던 코소보가 독립을 시도한 것. 진압작전은 코소보 전쟁(1998)으로 번지고 이 과정에 학살이 자행되어 나토(NATO)가 개입을 부르며 유고 공습(1999)으로 이어진다.
신 유고연방은 나토의 공습이 이어지자 일단 전투력을 보존하기로 했다.
이때의 일화 한가지. 유고군은 전투기와 전차를 숨겨놓고, 원래의 기지에는 모형을 세워 놓았다고 한다. 나토군은 프라모델을 신나게 때려부쉈고 유고 지상군이 와해되었다고 오판했지만 사실 유고군 지상전력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만약 이때 종전이 되지 않아 나토 지상군이 투입되었다면 양측에 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또한, 김정일은 이 프라모델 전술에 감명받아 시찰단을 투입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후 핵개발 등 비대칭전력을 강화한 것은, 나토의 화력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전면전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답답한 사회주의 아파트단지>
코소보 전쟁 후 밀로셰비치는 학살의 책임을 지고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이름을 바꾸어 마침내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다.
얼마 후 몬테네그로마저 독립(2006)하여 세르비아 공화국이 되었으며, 코소보의 독립선언(2008)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세르비아에 대한 선입견은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거칠고 고약한 나라. 1차대전 등 각종 전쟁의 근원, 세계의 화약고! 그리고 주변국가의 시선도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는 유럽 연합(EU)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오랜 동지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도매급으로 묶이기 싫었던지 느닷없이 독립해버렸니…….
세르비아 남자들은 키가 크고 단단해 보였다. 또 기존의 편견에 의해 최대한 시비붙지않게 조심하고 빨리 빠져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세르비아에 올 계획도 없었으니.
하지만 세르비아를 알게 될 수록 이런 생각이 편견임을 알게 되었다. 풍경은 아름답고 세르비아인은 어떤 나라보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세르비아의 농촌>
밀로셰비치에 대한 선입견 역시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와 인종청소의 주범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과 토론하며 새로운 의견을 접했다. 밀로셰비치는 죄가 없다(not guilty)는 것. 무슨 소리일까?
밀로셰비치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알려진 것만큼 나쁘지도 않다고 한다. 특히 40년 전, 크로아티아에 의한 학살을 경험한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시도는 공포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6개국의 대통령이었던 밀로셰비치는 연방의 유지가 그의 임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로셰비치는 악하다기 보다는 무능했다는게 맞을 것이다. 티토처럼 조화롭게 통치하지도 못했고, 평화롭게 분리시키지도 못했으며, 독립시도를 신속하게 진압하지도 못하였으니!
<베오그라드 Skadarlija 거리 입구>
어찌 보면 이 동네 역사는 7세기의 동북아시아와도 유사하다.
<고구려와 유고슬라비아의 비교>
비슷하기로는 7세기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이며, 북한은 단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 하지만 1991년 남북 동시 UN가입으로 외부에서는 별개의 국가로 본다.
세르비아의 영토는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코소보를 포함한다. 당연히 코소보 독립선언은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많아서 위상이 애매하다.
외국인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판문점을 넘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코소보를 통한 세르비아로 입국은 불가능하다.
<코소보 입국금지, 세르비아로 우회하시오>
코소보를 바라보는 세르비아의 시각은 어떨까?
만약 대한민국에 일하러 온 중국인들이 공장 근처에 하나 둘씩 자리잡는다. 타향살이를 겪으며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다보니 그 지역은 중국인들이 더 많아졌다. 집값하락, 문화충돌, 치안 등 불편을 느낀 내국인은 하나 둘씩 떠나면서 중국인들이 더 몰려오고 한국이지만 한자 간판이 더 많은 곳-차이나타운이 형성된다.
그런데 세가 커진 차이나타운이 자치를 요구하더니 독립선언을 한다면? 이자들은 이미 중국에 생활기반이 없고 국적을 취득해서 강제 출국도 불가능하다. 내란이나 국가전복기도로 모조리 체포하려하자 폭동을 일으키고, 군을 투입하여 강제 진압을 하자 인권을 명분으로 중국 일본이 개입하여 독립을 지지한다.
<세르비아의 중국 상점. 전 세계를 점령할 듯한 기세>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코소보에 대한 세르비아의 입장이 이렇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인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성지였고 오래도록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접한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에 하나둘씩 몰려들더니 갑자기 독립을 선언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을까?
한편 알바니아인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오스만제국의 비호아래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오랫동안 코소보에 살아왔다.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이들의 입지는 불안했는데, 마침 연방이 종교와 민족을 따라 갈라졌다.
'이참에 우리도 독립하자, 당장 세르비아도 터키에서 독립한 나라가 아닌가?'
<니쉬에서도 중국 상점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면 제 3자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볼까? 어쩌면 국가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또다른 거대한 이익집단인것 같다. UN의 과반수 이상은 코소보 독립을 승인했지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도 많다.
러시아는 아마 같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 편일거고, 까딸루냐와 바스크를 안고있는 스페인, 키프로스 문제가 걸린 그리스 역시 세르비아를 지지한다. 애당초 역사와 문화가 다른 티벳, 위구르(동 투르키스탄), 내몽골 등을 병합해왔고, 대만(자유중국) 문제가 걸린 중국은 말할것도 없다.
재미있는건 북아일랜드 문제를 안고있는 영국은 코소보 독립을 승인했지만, 같은 굴러들어온 돌인 이스라엘은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코소보 독립을 승인했지만 외교관계는 없다고 한다. 아마 어느 한 편 손들어 주기 힘든 입장이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오랜 시간 니쉬를 지켜본 Tvrđava 요새>
이제, 세르비아에 비추어 분단되어 있는 우리 현실을 보자. 평화 통일을 이루고 하나된 조국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통합에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이질적인 집단을 골라내게 되고 공통점은 강한 단결을 이끌어낸다. 그 예로 7개국 연합체인 아랍 에미레이트에서는 이민족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을 통해 아랍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호에서처럼 슬라브인을 강조한 유고슬라비아와, 힌두교를 중시한 인도는 실패했다. 인도에서 무슬림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로 갈라졌고, 시크교도 역시 독립을 노리고 있다.
<세르비아와 일본 수교 125년. Milan Obrenović 왕과 명치유신의 일왕 메이지>
그러면 우리의 매개체는 뭘까?
학교에서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와 단일민족을 배웠는데, 알고보니 그 반만년은 천여차례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온 역사였다. 내부결속을 위해서는 단일민족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분단 이전에 우리는 한 민족이고 같은 역사와 언어를 공유해왔다. 민족분쟁이 없는것은 우리의 큰 강점이고, 종교 갈등이 없는건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느순간, 우리는 오랑캐와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버렸다. 다문화라는 용어가 익숙하고 심지어는 국기에 대한 경례에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삭제된지 오래이다. 이주민 1세대도 국회의원을 한다.
인종과 출신국에 관계없이 우리의 역사ㆍ문화 ㆍ미풍양속을 존중하고,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아직 조국과 민족이란 단어에는 동의하지 못할지라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하려는 귀화인은 두손들고 환영한다. 이런 예는 가야의 허황옥 왕후부터 아랍출신 장순룡, 여진 출신 이지란(퉁두란), 일본 출신 김충선(사야가) 등 다문화 정책 이전부터 많았다.
<세르비아 시장 풍경. 허술하나마 꼭 지붕이 있는게 터키식 바자르의 영향인 것 같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에게 동화되려 하지 않고 심지어 우리 법도 무시하며 자신들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자가 단지 경제적 이유로 한국을 선택한다면?
이들에게 '우리는 원래 같은 민족이므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 통일 후에는 남북의 균형 발전을 위해 많은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국가 위기시에는 자신의 재산이나 신체가 동원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거기에 기꺼이 동의하며 더 나은 삶을 제공해줬던 대한민국의 통일에 동참할까?
어쩌면 후자의 유입이 많아질수록 통일의 당위성은 엷어지고 아예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통일 이후 북한 주민의 동화 과정에서도 또 한번의 홍역을 치뤄야 할 지도 모른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올바른 상황판단 대신 피해의식을 갖기가 쉽다. 피부색과 국적에 관계없이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력의 차이, 교육이나 전문 지식의 습득 수준, 문화 차이, 언어 구사능력 등을 고려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와 필요 이상의 사회적 배려를 바란다면, 그건 오히려 차별이 아니라 분열주의이다. 만약 이때, 이해 관계로 얽힌 세력이 개입하여 피해의식을 부추긴다면 분열은 눈덩이 굴리듯 가속화될것이다.
기회의 평등 하에 각자의 개성과 특징이 드러나지만, 그 다름은 큰 울타리에 속해 있어야 한다. 우리의 가치관과 질서, 법을 무시하는 집단은 경계해야 한다.
<니쉬의 야경. Trg Stevana Sremca 부근>
과연 한때 전쟁을 치뤘고 이념과 생활수준이 극과 극인 남북이 코리아연방을 결성한다면 유지가 가능할까? 어쩌면 대립만 극대화되지 않을까? 따라서 1민족 1국가 2체제는 부정적으로 본다.
50개 주가 모인 미국은 몇개 주가 다른 의견을 갖더라도 서로 견제할 수 있고, 중앙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미국조차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내전(남북전쟁)을 겪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민족과 문화가 다른 집단이 사회 시스템에 원활히 융화되지 못했다. 갈등의 씨앗은 피해의식이라는 양분을 먹으며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다가 티토 사후에 폭발해버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질적인 집단이 정서적, 지역적으로 단결하는건 매우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편, Naser는 유고슬라비아 해체의 원인에 대해 또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과 주변 국가의 개입이 주 원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세르비아인은 반미 감정과 함께 강력했던 유고슬라비아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과거일 뿐이고, 현재는 세르비아 체제가 최선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들역시 유럽 변방의 인식이 좋지 않은 소국으로 전락한 처지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유고슬라비아 국기가 걸린 국립극장. 2014년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다>
Naser는 한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Young leader of North Korea has executed his uncle." 장성택의 처형 소식을 알려준것도 바로 Naser였다.
아버지가 시리아 출신인 Naser는 본인과 관련된 곳 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서 씁쓸한 농담을 했다.
내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배울 수 있는것은 통일이 아니라 분열밖에 없다고 한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을수도, 뭐라 위로할 수도 없는 슬픈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베오그라드로 돌아간 후 한 통의 메일을 보내주었다. 내 생각의 폭을 더 넓혀주고, 짧지만 깊은 시간을 함께 해준 Naser에게 정말 감사한다.
<한국의 통일을 확신하는 Naser의 메일>
지금으로부터 25년전, 88올림픽이 열리면서 신문에는 참가국 전체의 국기와 함께 간략한 소개가 실렸다. 세계에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었다니 놀라기도 했고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를 처음 본것은 그때였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모나코와 모로코,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늘 헷갈렸고,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는 아예 뒤엉켜서 내 기억에는 유고슬로바키아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내 기억에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내전은 없었다.
크게 이슈화된 독일의 통일과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소련해체 외에 줄줄이 이어지던 동구권의 붕괴는 적어도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걸프전(1990)이 발발했고, 다국적군의 결성,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스텔스기의 등장, 미사일을 잡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은 국민학생을 흥분시키고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특히 교류도 없던 공산권보다 석유와 관련된 페르시아만이 더 중요했고, 만화영화 방송시간이 줄어들면서 걸프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체감할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이해를 한층 넓혀준 세르비아 친구 Naser>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코소보 전쟁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선은 곧 이라크 전쟁(2003)으로 향했다. 국민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도록 줄기차게 싸워 온 발칸반도는 걸프만에 밀려 나에게 철저한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거짓말처럼 그 무관심하던 유고슬라비아 땅에 서 있다.
하지만 한 쪽 측면만 봐서는 결코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같은 종교의 민족국가로 독립한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겠지?
이 나라에 더욱 흥미가 생겼고 당분간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더 머무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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