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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India)

041. 인도 자전거여행을 마치며

  2012년 11월 4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인도 뭄바이(Mumbai)로 입국했다. 인도의 첫인상은 소란과 소음, 무질서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뭄바이 근처의 신도시(나비 뭄바이)에서 약 2개월간 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를 하였으나 가격/시간 대비 큰 수확은 없었다고 생각된다.(인도의 어학연수의 효과는 본인 수준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인도 여행경로. 검정색은 자전거 이동구간

  이 기간동안 헬스장에 다니며 85kg를 목표로 열심히 체중증가를 시도하였지만 고기가 거의 없는 식단 때문인지 실패했다.(인도인들은 대부분 마른 편이지만 헬스장에는 몸 좋은 사람도 많았다)

IKON GYM.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과

  어느새 새해가 밝았고 1월 5일. 83kg의 체중으로 푸네(Pune)를 향하여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였다.(애써 찌운 살은 순식간에 다 빠져버렸다) 첫날부터 데칸고원을 만나 고생하면서 푸네에서는 케빈이라는 좋은 친구도 만났다. 아잔타 가는 길에는 스포크 고장과 세균성 장염에 시달리며, World Toughest Trucker라는 NH86도로와 다리없던 켄 강을 지나 마침내 소나울리(Sonauli) 인도 국경까지 이동했다. 네팔에서 트레킹을 한 후, 비행기로 델리에 돌아와서 아그라 배낭여행을 마치고 기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4개월 반의 인도 생활을 마무리했다.

  인도에서 본 것은 따뜻한 사람들. 그리고 엄청난 빈부격차와 가난. 모든것을 아우르는 무질서함이었다.

판자촌 뒤로는 고급 아파트

  엄청나게 큰 나라. 40여개의 주마다 언어가 따로 있고, 지폐에 인쇄된 인도어만 15개인 나라.(영어까지 16개) 동전도 지폐도 다양하고(5루피, 10루피는 동전과 지폐가 함께 통용) 뭐 하나 통일된게 없는 곳.

좌측 상하단 100 사이에 15개의 언어 표기. 사투리 정도가 아니라 알파벳까지 다르다.구형 1루피와 신형 2루피의 크기가 동일하여 가게주인도 종종 실수한다.

  기후는 온난하여 일만하면 굶주릴 일 없고, 심지어는 길에서 자도 얼어죽을 일도 없다. 체질인지는 모르겠으나 땀 흘리는 사람을 거의 못봤다. 도무지 뛰지 않는데(크리켓 할 때는 제외) 날씨에 적응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걸음걸이는 어슬렁거린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되며,(한국인 분당 평균 120보, 인도인 80~110보) 일 하는 속도도 느리다. 뭘 해도 게을러 보인다.(오죽하면 전 국민 딱 3개월씩만, 인간개조의 용광로-대한민국 해병대에 보내면 좀 빠릿빠릿해 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대학시절 공사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접한 경험이 있다. 그때 나는 그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프로 노동자들 작업량이 아마추어였던 대학생보다 적었으니까. 가끔 할당량만 끝내면 일당 받는 도급제(일명 '야리끼리')로 일하면 항상 내가 먼저 퇴근했다.(물론 국적, 직종, 개인차 등 다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대체 왜 먼 외국에 돈벌러 와서 정작 일은 안하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향에서보다) 정말 열심히 일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인들은 빨리빨리밖에 모르고 엄청난 할당량을 주어 혹사시키는 사람으로밖에 안비칠 것이다. 

손으로 돌리는 수동레미콘. 깨작깨작 일하는 사람들

  주 종교는 힌두교이지만 이슬람교, 기독교, 시크교, 자이나교 등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인종은 혼혈로 예상되는 백인같은 사람부터 남부의 까무잡잡한 사람, 북부 시킴주 사람들은 중국사람과 흡사하다.

  자원도 많고 식량이 풍부하고 살기좋은 땅으로 고대 인더스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이지만, 영국 식민지배를 거쳐 지금은 가난한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보릿고개없는 기후는 열심히 일 할 필요도, 저축할 필요도 없게 만들었고, 힌두교와 카스트도 가난에 크게 한 몫을 한 것 같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배 300년을 참아 낸 힘도 현 생에 무관심하며 차별을 인정하는 힌두교의 영향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반면 근면성실하고 관대한 시크(Sikh)교도들은 마음에 들었다. 이들은 사막을 개척하여 도시를 만드는가 하면, 세포이 항쟁때도 앞장서서 외세에 맞서 싸웠던 주역이었다. 시크교는 구루 나낙(Guru Nanak)이 만든 종교로 독실한 시크교도들은 평생 이발하지 않고, 쇠링과 칼을 차고 다닌다.

구루나낙 탄생일에 시크교 사원에서. 반드시 머리를 가려야 입장 가능

  종교로 인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분리, 수상 인디라 간디의 암살에 얽힌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보면 종교로 싸울 일 없고, 게을러질 수 없게 만드는 적당한 기후의 대한민국이 고맙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크리스마스에 인도의 교회에 가봤다. 건물만 같을 뿐, 언어별로 목사님이 따로 있고, 예배도 따로 한다.

  인도의 질서의식. 특히 교통문화는 최악이었다. 더 신기한것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오히려 더 가난하다는 네팔의 교통이 더 신사적이었다.(파키스탄도 인도보다는 양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준법, 양보, 배려, 희생이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할까 싶을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양보란 존재하지 않을것 같은 인도에서 헌혈이 활성화되어 있다. 헌혈 기념품은 장미 1송이.

  질서와 법규는 행동을 조금 제약하는 면은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질서없는 인도는 강자가 우선이다. 힘이 없으면 밀린다. 목소리도 더 커야 잘들린다.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은 목소리가 크고, 도시는 시끄럽다. 거지조차 얌전히 구걸하지 않는다. 바지가랑이를 잡던 손을 잡던, 이상한 마술쇼를 보여주던, 아니면 우는 아기를 보여주던 끊임없이 자기 PR을 한다.

사격해서 받은 자동차는 팔짱끼고 대기하고 있던 꼬마에게로~

  덕분에 아파트, 학교, 대형 쇼핑몰 등 조금 크다 싶은 곳에는 제복입은 경비원들이 위치하고 있고, 수시로 금속탐지기로 몸수색을 하지만, 정말 대충대충 한다. 도심 곳곳에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지만, 정자세로 서 있는 인원은 거의 없다. 짝다리 짚고 있고, 무거운 방탄복은 옆에 벗어던져 놓았다. 정신무장이 부족하니 파키스탄, 중국 등 전쟁만 하면 결과가 좋지 않고, 그러다 보니 회심의 한방 - 핵까지 개발했으나 국민들은 가난하기 짝이 없다.

호스텔의 안전요원 말라키 싱. 두달동안 교육했으나 받들어 총과 앞에 총을 끝내 마스터하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반면, 시골에서는 따뜻한 인심이 살아있었고, 어느순간 인도의 관광지나 명소들보다 시골 마을이 더 좋아져버렸다.

디왈리(Diwali) 축제기간 불꽃놀이. 소총보다 더 소리 큰 폭죽도 시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인도는 위대했던 선조들의 유물을 이용해 먹고 사는 느낌이다. 관광지에는 수십배의 외국인 요금을 받지만 서비스 차이는 없다.(타지마할 입장료 인도인 20루피, 외국인 750루피. 약 15,000원 더 내는 대신 생수 한 병 서비스로 준다) 수많은 외국인들은 자기들의 고향과 다른 모습(가난, 무질서, 게으름)을 보면서 흐뭇해 하며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 이게 인도다움이라면서.

  과연 인도다움이 뭘까? 아직도 전통의상을 입고 다녀서? 다른건 모르겠지만 질서의식과 조금의 매너를 더 갖춘다고 인도답지 않은 것은 아닐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것은 여행지로 '인도'를 선택한 자신의 선택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슬럼보다 열악한 천막촌의 모습. 하지만 여기도 삶의 현장

  인도는 우리 대한민국과도 관계있는 나라다. 아요디아(Ayodhya)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바닷길을 이용. 가야에 상륙하였으며 수로왕과 혼인하여 김해 김씨, 김해 허씨에 유전자를 남겼다. 불교를 통해 인도의 문화가 간접적으로 전파되었으며(엘로라 / 아잔타 석굴에서 다시한번 문화교류의 흔적을 느꼈다) 신라시대 혜초스님은 인도까지 기행하며 왕오천축국전을 남기기도 하였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나 결국 외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2차대전 후 독립한 것도 비슷한 역사이다(심지어는 날짜도 같은 8월 15일에 독립. 단, 인도가 2년 느림) 6.25 사변이 발발하자 3년밖에 안된 신생독립국(중립국) 인도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의료, 보급 지원을 한 고마원 나라이기도 하다.

그땐 어땠을까? 21세기에 수도가 없어 스스로 물 보급을 하는 판자촌 여인들.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았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고, 많은것을 보고 느끼게 해 준 인도. 훗날 언젠가 다시 인도를 찾게 되면, 위대한 선조들의 정신문명 위에 성숙한 질서를 갖춘,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인도의 모습을 기대하며 인도 자전거 여행을 정리한다. 

지금은 판자촌에 사는 이 아이들이 지금 내 나이쯤 되면, 더 나은 인도가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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