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와 헤어지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Beograd)를 목표로 주행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혼자 달리는 길이다. 세르비아에서 만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페달을 밟아 보지만 어째 속도가 나지 않는다.
<조그만 강을 건너며 행진>
세르비아 북부는 유독 호수가 많았다. 호수가 인상적이었던 Backo Gradiste의 경치를 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었다.
<노을지는 호수>
잠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어째 마음에 드는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조금만 조금만 하며 더 가려는데 어느새 어둑어둑 해지고 대충 아무데서나 자기로 했다.
그동안 운 좋게 너무 편한 잠자리에서 익숙해져서 그런지 지붕없는 들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호수마을 Backo Gradiste를 3km정도 벗어난, 추수가 끝난 밭에 들어가 잠자리를 준비한다.(주행거리 41.67km, 누적거리 7,210km)
석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만사가 귀찮아졌다. 함께 요리하고 음식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가 새삼 느껴진다. 대충 쌀만 익힌 밥에 소금 후추 조금 뿌려 대충 한 끼를 때우고 잠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후두둑 소리. 밖을 확인 해 보니 비가 내린다. 에휴.
텐트 속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비가 그칠 것 같지 않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없고, 배도 고파서 비가 주춤해지자 바로 텐트를 철수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하필 밭에서 자는데 비가 내려 텐트 바닥에 진흙이 많이 묻었고 왠지 무게까지 묵직해진 기분이다.
<호수는 계속 나온다. 이번에는 낚시터>
어쨌든 출발하는데 역시 빗 속 주행은 고역이다. 지나다니는 차는 언제나 바퀴에서 진흙을 분사한다. 옷도 금세 더러워지고 기분도 좋지 않아 마을 슈퍼마켓이 보이자마자 주행을 멈췄다.
대충 아침식사를 마치니 비가 그칠 듯 하다. 다행이다.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양파같이 생긴 지붕의 성당>
Vilovo에서부터 길은 조금 돌아가도록 되어있다. 다시 비가 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빨리 가기위해 지도에 없는 밭 사이의 샛길로 들어섰다. 방향은 대충 맞는 듯 하니 길만 이어진다면 지름길이다. 길 상태는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게 더 빠르겠지?
아, 잘못된 선택이었다. Gardinovci라는 작은 마을에서 길은 끊겨 있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으.. 지도를 따라 갈 걸. 괜히 시간과 체력만 낭비했다.
세르비아 북부는 거의 평지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언덕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달리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심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치가 특이하다.
<이름모를 삼거리>
길의 왼쪽(동쪽)으로만 야트막한 언덕이 계속 이어지는 길. 어릴 때 놀던 대머리산이 떠오른다. 연도 날리고, 불장난도 했었는데……. 대머리산이라고 부르던 작은 언덕은 내가 중학생때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대머리산을 연상시키는 작은 언덕>
근처에 보니 작은 개울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세수를 하는데 누군가가 부른다. 세르비아 청년들은 체격도 좋고, 머리도 해병대 돌격형 머리처럼 짧게 자르고 다녀서 강인한 인상을 준다.
또 워낙 이미지가 좋지 않은 나라이다 보니 약간 경계를 하며 다가갔다.
자신을 Dejan Nemeti라고 소개한 친구는 막 땄다면서 사과를 하나 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좋은 여행이 되라면서 코팅된 작은 카드를 한 장 준다. 이게 뭘까? 들여다보니 꼬깃꼬깃해진 정교회(Orthodox) 스타일의 예수님 그림이다. 어째 부적같은 느낌이다. 아무튼 인상과는 달리 좋은 친구들이었다.
<부적(?)을 들고있는 Dejan과 Jokobiche>
Dejan Nemeti와 Jokobiche를 뒤로하고 다시 출발. 이제 날은 완전히 개었다.
반나절을 달렸더니 매우 지루하다. 그동안 늘 혼자 달려왔었는데, 달마와 함께 다닌 후 혼자 다니는 길이 여러모로 힘들다.
<나라 이미지와 다르게 전원 풍경은 참 평온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21시가 넘어서야 베오그라드(Beograd)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 표기도 있고 벨그레이드(Belgrade)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기에 무슨 차이일까? 하나는 시(市)이고 하나는 구(區) 정도 되려나?
알고보니 베오그라드의 영어 명칭이 벨그레이드였다. 왜 이리 헷갈리게 만드는거야? 하긴 대한민국이나 Republic of Korea나 같은 나라이니까.
<베오그라드 시내. 길 중앙에 매달린 신호등이 특이하다>
예약되어 있던 Good Morning Hostel에 체크인했다.
스텝은 친절하게 맞아 주었으며, 자전거도 실내에 보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숙소를 예약하고 온 건 처음이다. 다행히 1박에 5.6유로로 저렴한 편이라 다행이다. 위치도 시내 중심이라 편리하다.(10월 14일 주행거리 129.61km, 누적거리 7,340km)
<한동안 묵게 될 Good Morning Hostel>
Novi Sad 대신, 갑자기 베오그라드로 경로를 변경한 이유는 바로 재정 문제였다.
그동안 과소비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자금은 다른 계좌에 넣어놓았고, 돈이 필요할때는 인출할 만큼만 해외 현금카드로 이체하여 인출해 쓰고 있었다.
그런데 계좌이체를 위해 필요한 OTP가 먹통이 된 것. 루마니아 Jimbolia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나마 티미쇼아라(Timisoara)에서 유로로 환전해 둔 게 있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지만, OTP가 작동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여행은 불가능하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증기자동차>
혹시 저온 때문일까 옷 속에 보관을 해 보고 여러 시도를 해 보아도 아무 표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배터리가 다 된 것일까?
나사도 없는 OTP를 억지로 뜯어보니 수은전지가 하나 납땜되어 있다. 자전거 속도계에 CR2032를 쓰는데 동일한 전지인지 확인하려면 납땜을 뜯어야 한다. 혹시나 해서 납땜을 뜯어 보니 CR2032!
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건전지를 교체하니 액정에 글자가 나온다.
<건전지를 교체한 OTP>
그런데 dnLd? 다운로드? 아차 싶었다. 차라리 전압이 안맞아 고장나더라도 병렬로 연결해 볼 걸. 아마 은행 서버와 시간 동기가 맞아야 하나보다. 기준시간을 맞출 수 없는 OTP는 dnLd 메세지만 표시한 채 더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아. 눈앞이 캄캄하다. 이거. 여기서는 해결 불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 통행 삼거리>
그러면 마지막 방법. 예금계좌가 있다. 출국전, 자금 일부를 1년짜리 예금에 넣어놓았는데 이제 만기되었다. 해외 현금카드를 만들면서 개설한 계좌다. 이 돈을 해외 현금카드에 연결된 입출금 계좌에 넣는다면 모든게 해결되는데…….
다음날, 눈 뜨자마자 은행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베오그라드 시내>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본인이 직접 내방해야만 예금해지가 가능하다는 것. 으으으.
'아니, 내 계좌가 만기되어 내 명의의 인출가능한 계좌에 넣겠다는데 대체 왜 안되냐? 몇가지 질문으로 본인 확인 하지 않았냐?'
아무리 따져봐도 금융사기 증가로 보안규정이 강화되었다는 대답만 할 뿐이다.
<베오그라드의 클래식 카>
보이스 피싱하는 이 자식들은 군 생활할때도 여러가지로 귀찮게 하더니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구나.
<일장기가 그려진 버스. Donation From the people of Japan? 일본에서 기증?>
그동안 위기때마다 도움을 준 성재에게 연락을 해 봐도 당장 가용한 현금은 귀국을 도울 정도밖에 없었다. 으아. 통장에 잔고도 있는데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사용할 수 없다니. 답답 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현재 수도이므로 최악의 경우에도 용이하게 탈출(?)할 수 있다는 것 뿐.
<아아. 한국 기업에 협찬이라도 요청해 볼까?>
약 1년. 7,340km. 이제 귀국을 해야 하는건가?
<국회의사당 Narodna skupština(National Assembly)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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