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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Croatia)

147. 자그레브 공원과 군수 청소년회관

  소나기는 세시간 가량 지속됐다. 뜻하지 않은 비 때문에 일정이 많이 지체되었다. 조금 속도를 내어야겠다.

<경치와 어울리지 않는 전차와 전투기. 이게 없다면 이 땅의 피의 역사를 짐작이나 할까>

  우중충하던 하늘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파란 하늘 아래 달리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주위는 푸르른 들판이다. 이따금씩 벌써 추수가 끝난 곳도 보인다. 잠깐, 6월인데 벌써 추수가 끝났다고?

<벌써 추수가 끝난 들>

  물 고인 논이 아니므로 벼는 아닐 것이다. 혹시 보리? 아하, 보릿고개가 늦봄이었지! 이제 초여름이니 보리 수확기겠구나.

  흠. 그런데 유럽에서 보리를 먹었나? 그러고 보니 보리요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보리라는 영단어도 떠오르지 않는걸로 보아 보리를 접할 일이 없었던게 맞다. 먹지 않는 보리를 심었다면 아마 사료용으로 재배하나보다.

  아, 맥주가 있었구나! 여기 맥주밭이었어.

  혹시나 보리가 아니면 밀일 것이다. 빵 만들려면 보리보다는 밀이 더 많이 필요할테니…….

  그나저나 대학까지 나오고서 밀과 보리도 구분못하니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밭에는 둥글게 말린 짚단이 늘어서 있다. 사실 계속 보아오던 풍경이다. 알고보니 이게 사료였다. 짚더미를 Silaža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사일리지(Silage)라고 한다.

  사일리지가 늘어서 있는 밀밭인지 보리밭인지 사이를 지나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으로 전혀 힘들지 않다. 인적도 드물어 달리면서 잡생각을 하기에도 좋다.

<푸른 들에는 Silage가 듬성듬성 놓여 있다>

  밭을 보며 벼를 먼저 떠올린 이유는 쌀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만 쌀을 먹고 ‘서양’ 사람들은 빵을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쌀은 어디에나 있었다.

  단 ‘인디카’라고 하여 길쭉하고 찰기가 없는 종류다. 주식이라기보다 다른 음식에 곁들이는 정도다. 만일 밥을 먹는다면 대부분 볶음밥이다.

  말레이시아의 고렝, 인도의 비리야니, 터키의 필라프 따위가 일종의 인디카 볶음밥이다. 한국인이 밥이라고 부를만한건 네팔의 달밧 이후에는 접할 수 없었다.

  이에 비해 한국 쌀은 ‘자포니카’라고 부른다. 자포니카는 잘 보이지 않고, 있더라도 가격이 1.5~2배 가량 비싸다. 이름에서 일본쌀이라는 어감이 느껴진다.

<아. 그림같은 공간>

  이 쌀은 비록 자포니카로 불리지만 동북아시아 외에서도 생산된다. 예를 들면 이집트.

  UAE에서 먹던 이집트쌀은 가격이 저렴한데다 윤기가 흐르고 미각이 둔감한 내가 좋은 쌀이라고 느낄정도로 맛있었다. 어쩌면 덥고 배고파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50℃가 넘는 날씨에 땀 뻘뻘흘리며 밥을 지은건 맛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반면 처음에는 별로였던 인디카는 알고보니 여행에 최적이었다. 찰기가 없는 덕분에 설거지가 매우 편하다. 불리거나 뜸들이지 않아도 먹을만 하다. 고도가 높아도 설익지 않는다. 아니 잘 익어도 설익은 자포니카같다.

  물은 자포니카보다 더 필요한 듯한데 어렵지 않다. 밥짓다 뚜껑열고 조금씩 맛보면서 퍽퍽하면 물을 더 붓고 끓이면 어느순간 적당해진다. 즉 물조절도 시간 맞추기도 좋다. 덕분에 나의 유사(類似)한식이 가능하다.

  크로아티아(Croatia)의 쌀도 인디카로 리자(riža)라고 부른다. 영어 rice나 이탈리아 볶음밥 risotto와도 비슷한게 어원이 같은가 보다. 눈썹없는 모나리자는 나의(Mon A) 쌀(riza)?

<특이한 크로아티아 신호등>

  각종 잡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금세 날이 저물었다. 비 때문에 지체한 탓이다. 오늘도 야간주행이구나.

  얼마 후 가로등이 밝게 비치는 넓찍한 도로가 나타났다. 드디어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Zagreb)에 도착한 것이다.

<큰 기대없이 자그레브 진입>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마음에 든다. 아마 발칸지역에서 가장 넓은 도로가 아닐까 싶다. 반면 밤이라 그런지 자그레브서 특별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미리 봐둔 값싼 숙소를 찾아갈 뿐이다.

  사실 자그레브는 그다지 볼것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아직 걷는게 불편해서 플리트비체보다는 숙박료가 저렴한 자그레브에서 며칠 쉬어갈 생각뿐이다.

  시내 북동쪽에 위치한 Funk Lounge Hostel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웠다.(6월 5일 주행거리 120.51km, 누적거리 10,097km) 숙박료는 67.5쿠나(약 13,500원)로 플리트비체 캠핑 수준이다. 직원도 친절했고 호스텔도 마음에 들었으나 단체손님 예약 때문에 하룻밤 밖에 머물지 못했다.

<괜찮아 보였으나 인연이 짧았던 Funk Lounge Hostel>

  결국 호스텔을 옮겨 자그레브서 조금 더 쉬기로 했다. 급히 인터넷을 찾아보니 대부분의 숙소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근처 슬로베니아는 더 비쌀텐데 어쩐다?

  그러다 Logistic Youth Centre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숙소를 발견했다. 군수(軍需) 청소년회관? 시내에서 1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가격은 일박에 단 35쿠나(약 7,000원).

  연락해 보니 빈방이 있다고 한다. 근처에 오면 차로 픽업해주겠다는데 나 혼자 찾아갈 수 있을테니 정중히 거절했다.

<조기를 계양하고 군수 청소년회관으로>

  마침 6월 6일 현충일이다. Wing 핸들에 태극기를 내려달았다. 깃봉이 짧아 정식 조기는 아니다. 사람들이 왜 깃발을 이상하게 다는지 물어본다. Memorial Day라고 했는데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여기는 조기를 게양하는 문화가 없나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그런데 새 숙소를 찾아가며 바라보는 자그레브의 느낌은 전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니 대체 왜 이런 곳을 별로라고 했을까? 크로아티아의 다른 도시들이 워낙 대단해서 상대적으로 밀린건가?

  시내에는 벽화가 종종 보인다. 낙서수준이 아니라 괜찮은 그림이다.

<21세기 미켈란젤로? 천지창조를 그리는 화가까지 그림> <만화같은 그림도 좋고> <축구를 좋아하는 크로아티아>

  재미있는 벽화 뿐만 아니라 자그레브 도시 자체가 좋아보인다.

  남쪽으로 가다보니 긴 다리가 나온다. 강 자체는 좁지만 양쪽 둔치가 매우 넓다. 강이 마음에 들어 지도를 확인해보니 Sava강이다. 사바강이라면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본 바로 그 강이구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까지 이어지는 사바 강>

  자그레브를 남북으로 나누는 사바강이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둔치 때문이다. 도시 내에 이렇게 넓은 규모의 녹지가 있다니.

  방금 전까지 도시였는데 바로 어느 정겨운 시골마을로 들어온 기분이다.

<도로변이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다소 복잡하던 강북에 비해 강남은 한적했다.

  건물 높이가 낮아졌고 녹지가 가득하다. 차도와 인도 사이가 가로수로 분리되어 있고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어 도시를 다니면서도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공원같아 보이는 Avenija Dubrovnik 도로>

  도시전체가 잘 가꾸어진 공원처럼 느껴지는 곳. 대체 어느나라 수도가 이런 분위기를 갖고 있을까?

  큰길 Sarajevska cesta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자 더 이상 도시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호젓한 마을일 뿐이다.

<십자가가 세워진 삼거리>

  가톨릭 국가인 크로아티아답게 성당이 매우 흔하다. 하지만 눈길을 잡아끄는 성당이 보였다. 바로 목조 성당.

  나무로 만든 이 성당은 주변 분위기와 어우러져 적요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 위의 십자가가 특이했다. 마치 결핵협회 마크처럼 열십(十)자 위에 가로선이 하나 더 있었다. 저런건 주로 정교회에서 많이쓰던데. 나중에 한번 가봐야겠다.

<여러모로 독특한 목조 성당>

  잠깐, 지도에 의하면 이 근처인데.

  성당 건너편에는 마치 창고같은 건물이 하나 있다. 지붕선이 오돌토돌한게 옛날 슬레이트를 얹어놓은듯하다. 설마, 진짜 슬레이트면 석면일텐데?

  어딜 봐도 호스텔 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가만히 보니 구형 군 병사(兵舍)같기는 하다. Logistic이란 이름도 그렇고 군 병사를 개조했나보다.

  건물 옆 밭에서는 퇴비 냄새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설마 여기가 호스텔인가?>

  미심쩍지만 일단 건물로 들어가봤다.

  바로 찾았다. 나이가 있어보이는 블라드라는 친구가 반갑게 맞아줬다.

  숙박비를 내려고 하니 잔돈이 없다고 한다. 짐 풀고 슈퍼에 다녀오겠다고 하니 갑자기 1,000쿠나(약 20만원)를 내밀더니 잔돈으로 바꿔오라고 부탁한다. 담배 한갑 사다달라는 말도 곁들였다. 아니 이사람 대체 뭐지?

  어느 숙소에서도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나를 믿는것 같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일단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

<숙소 관리자 블라드>

  2인실을 배정받고 짐부터 풀었다. 이런 방을 35쿠나에 혼자쓰면 거저나 다름없다.

<침실도 아늑하다>

  입구 반대편 식당에는 취사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휴게실도 넓찍하다. 특히 뒤뜰에 파라솔과 썬베드에 간이 풀장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더욱 좋았다.

<식당. 다트에 표시된 BACI는 크로아티아어로 ‘던지다’라는 뜻>

  독특한 분위기의 Logistic Youth Centre. 왠지 친근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다.

  아, 괜히 왔나? 어쩌면 이곳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불현듯 스쳐간다.

<풀장이 구비된 뒤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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