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네팔(Nepal)

043. 포카라를 자전거로?

  3월 28일. 드디어 룸비니(Lumbini)를 출발 포카라(Pokhara)로 향했다.

홀리(Holi) 축제 덕분에 얼룩소가 되어버린 흰 소와, 시골 짜이가게

  약 20km 계속된 비포장도로 후 마침내 번듯한 도로가 나왔다. 아스팔트에 자갈 함유가 높은듯 쭉쭉 치고나가는 느낌은 없지만 넓고 깨끗하고, 인도와는 달리 파손즉시 수리한 흔적도 있었다. 

아스팔트 표면은 상당히 거칠지만 인도에 비한다면야

  오랜만에 자전거 안장에 앉은 느낌은 좋았다. 특히 앞에 랙을 단 덕분에 가방하나를 앞으로 옮겼고 핸들이 무거우면 조향이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묵직한 핸들이 더 듬직했고, 오르막길도 한결 수월한 듯 하다.

  도로상태도, 주위 풍경도 만족스럽다. 주위 주택들은 자극적이지 않은 파스텔톤으로 산뜻하게 칠해져 있다. 부트왈(Butwal) 시내를 지나자 산악도로인 싯다르타 하이웨이가 나타났다. 이 도로만 계속 따라가면 포카라다.

  하지만 싯다르타 하이웨이 진입 후 1km도 안되어 후회가 밀려왔다. '난 대체 무슨생각으로 이 길을 자전거로 가려고 했을까? 다시 룸비니로 돌아가서 버스로 이동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스님과 S선생님, 다른 여행자들에게 포카라 가겠다고 호언장담한게 떠올라서 돌아가기도 창피하다. 말이나 안했으면 그냥 갈걸. 역시 입은 화의 근원이다.

  10km정도 산악도로를 달리니 탈진상태. 인도에서 다리없는 켄 강도. World Toughest Trucker도 지났으면서 왠 호들갑인가 하겠지만, 포카라에 가 본 사람은 이해 할 것이다. 자전거 여행 첫날 나를 괴롭힌 데칸 고원은 뒷동산일 뿐이었다.

결국 국도변에서 G.G.

  지도에는 단지 꼬불꼬불한 길일 뿐이지만 이게 다 해발 400~1,200m를 넘나드는 언덕길이다.

구겨진 종이같은 지도는 산악국가가 뭔지 보여준다.

  더는 못가겠다 싶더니 뒷바퀴 스포크 하나가 또 부러진다. 이제 스포크 교체는 금방이다. 다행인건 인도에서처럼 구름같이 몰려들어 구경하며 방해하는 사람이 없는것. 하지만 이 길을 언제 갈꼬.

  S선생님이 싸주신 계란을 먹으며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어느 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고, 이제 숙영지를 찾아야 하는데 산에서는 조건이 복잡하다.

  1. (위험한)사람 눈에 띄지않도록 마을에서 적당히 이격

  2. 야생동물 습격에 대비 마을에 인접

  3. 차가 전복되어도 안전하도록 적당히 도로와 이격

  4. 산사태시 안전하도록 산과 적당히 이격

  5. 강풍에 대비하여 벼랑과 적당히 이격.

  도무지 해당되는 곳이 없다. 결국 한 식당에서 문 닫으면 바닥에서 잘 수 있는지 허락받으려는데 300루피에 방을 주겠다는 것. 이런 길을 며칠이나 갈 지도 모르는데 300루피(3,900원)내고 제대로 쉬는게 낫겠다 싶어서 투숙을 결정했다. 위치는 Kerabari.(주행거리 59.55km, 누적거리 2,693km)

  호텔이라는 간판조차 없지만 2층의 방은 깨끗했고, 남동생이 한국에서 일한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했다. 이 마을에서 한국인을 본게 처음이라는데, 굳이 찾아와서 묵을 이유가 없는 마을이니만큼 그럴 만 하다.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준 숙소

  침대에 누웠는데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다행히 좋은 숙소를 찾게되어 푹 쉬고 다시 길을 출발.

투어링 캔버스에 응원메세지를 적어주시는 중

  여전히 길은 힘들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니 경치가 기가 막히다. 마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제대로 하는 기분. 아마 여기도 히말라야로 연결되는 산자락이겠지? 어차피 제대로 내지 못할 속도보다는 이 절경을 즐기면서 가기로 했다.

힘들어도 파이팅

  중간중간 파손된 도로가 있는데 주변을 보면 여지없이 산사태의 흔적이다. 신속하게 이탈.

산사태는 도로에 흔적을 남겼다.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은 항상 위험을 안고 산다

  완전 옥빛이었던 개울도 나타났는데 카메라는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물이 이런 색을 띌 수 있다는게 신기할 뿐이다. 50.72km(누적거리 2,744km)을 달려 Narayan Parsad라는 곳에 Santa Hotel이라는 곳을 발견하고 전날과 동일한 300루피에 투숙 결정.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옥빛이었던 계곡

  난 스스로 합리적이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하는 짓은 불합리의 극치다. 대체 하루에 Crazy Guy 소리를 몇 번을 들은건가!. 이상한 여행 경로 설정도 그렇고, 왜 여기를 자전거로 가려는건지?

  다시 해가 밝아왔다. 출발 준비를 하는데 어? 자전거를 탄 서양인들이 지나간다. 여자 2명, 남자 1명. 신기한건 복장은 잘 갖추었는데 짐은 없었다. 일단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들을 따라잡고 잠시 쉬며 이야기해 보니, 투어 프로그램으로 짐은 차에 싣고 양호한 구간을 자전거를 즐기면서 타는 것이다.(뒤에 호송하듯 승합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앤과 스티브, 앤드 다이애나

  그래. 이런게 상식이다. 이들은 스티브와 앤 부부, 그리고 다이애나라는 호주인이었다.(Ann을 and로 듣고 Steve and Diana 또 한명은 누구냐? 라고 재차 물어봤던 창피한 비화도 있었다). 특히 스티브는 이날 생일이었다. 축하해 주고 출발. 얼마나 갔을까? 지쳐 쉬는데 또 짐없는 MTB가 한대 등장.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해보니 네팔에 사는 독일인으로 역시 포카라에 가는 길이며 짐은 전날 아내가 다 가져갔다는 것. 그는 바람처럼 달렸으나 그에게 안지겠다는 생각으로 질주.

영차영차 달려라

  달리기도 그렇지만 앞에 한명이 있으면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다. 약 두시간 가량 혼자서는 생각도 못할 구간과 거리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내공 사용은 주화입마를 부르는 법. 결국 포카라를 30km여 앞두고 완전히 지쳐서 뒤쳐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먹었구나. 룸비니에서 사 둔 라면은 정말 유용했다. 숙소를 찾아야 하나? 그런데 30km 조금만 더 고생하면 2박3일에 갈 수 있다. 나름 기록이다. 그냥 가보기로 했다. 어느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1,200고지를 넘자 비도 그치고 내리막이 나타난다. 포카라는 800m 정도니까 이제 고생 끝인가보다.

꿀맛 같은 라면

  역시 방심은 금물. 다시 오르막이 등장한다. 으 이 길은 끝도없는 산길이다. 어느새 해는 지고 결국 20:00경에야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났다. 드디어 포카라다.

  우어~ 포카라~ 포카라~를 외치며(어차피 Crazy Guy 모드다) 달렸다. 드디어 2박3일간의 사투끝에 포카라에 온 것이다.(주행거리 90.23km, 누적거리 2,834km)

첩첩산중의 도로

  룸비니-포카라행은 내 삶에서(육체적으로) 3번째로 힘든 순간이었다.(2위는 유도했을 때. 1위는 대학시절 HPVF를 준비하며 운동했을 때) 다시 하라면 절대로 안할 것이다. 확실한 건, 난 고생 좀 하고 정신 차리려고 했는데 육체적 고생과 철 드는것과는 무관한것 같다. 힘들어서 정신 차린다면 벌써 자리잡았겠지.

  하지만 도로 중간의 절경과, 네팔사람들의 환대, 그리고 네팔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차를 탔으면 절대로 보지 못하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 해 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삼겹살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 다시 포카라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한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윙

  다음글 ☞ 044. 다시 안나푸르나를 향해(안나푸르나 라운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