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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Nepal)

047. Rhabdomyolysis - 안나푸르나의 역습(안나푸르나 라운딩 마지막)

  4.12. 열흘째(25km)

  전날 굳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묵티나트(Muktinath) 대신 카그베니(Kagbeni)까지 온 이유는 무스탕(Mustang)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스탕은 비밀의 왕국이라는데 일반 트레커들이 입장하려면 허가에 500달러정도 한다. 왜 무스탕만 말도 안되게 비싼지 누구하나 속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무스탕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Kagbeni를 떠나서도 계속해서 황무지만 이어진다. 주위에는 산.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계곡이라는데 일반적인 계곡이 아니라 중간에 비포장 도로가 있는 산 사이의 넓은 공터다. 바람불거나 차량이 지나가면 먼지만 날리고 걷는 재미도, 보는 재미도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길.

이게 계곡? 분지 아니야?

  트레커들도 갑자기 다 어디로 사라진건지 안보이고 계속 혼자 걷는다. 게다가 토룽 라를 넘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안내판들은 벌써 트레킹이 끝났다는 생각만 들게 만들 뿐이다. 이런저런 잡생각만 하면서 걸었다.

See you again? 아직 끝난거 아니라고

   산악 트레킹을 하면서 산길을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중간 중간에 산길로 빠지는 길이 있는데 역시 재미없다. Chhairo의 티벳 마을이 있었는데 티벳의 모습은 없고 기념품 가게일 뿐이다. 좀솜(Jomsom)에 Mustang Eco Museum이 있길래 무스탕에 대한 아쉬움을 여기서 달래기로 했다.

Mustang Eco Museum

  매표소에는 A4한장이 붙어있었는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이게 무스탕이 금지된 이유?

  그런데 그 소리가 그 소리잖아? 대체 왜 티벳의 보석이고, 금지된 왕국이고, 특별히 관리하냐고?

  박물관은 규모는 아주 작았지만 무스탕 원주민의 밀랍인형과 생활도구들, 동 식물 표본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사원도 조성해 놓았다. 무스탕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된건 아니지만 어렴풋이 느끼기에는 상업화 시키는 것 보다는, 독특한 자연환경과 문화를 보존하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특히 중국 국경이 가깝다는 이유는 티벳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적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식물은 문외한이라 소나무밖에 모르겠고, 사원의 북은 한국북과 흡사했다.

  산의 작은 마을을 느껴보려 일부러 코방(Kobang)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곳의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이름은 롯지인데, 방이 없다. 숙박을 물어보니 그제서야 창고같은 빈 방에 부랴부랴 낡은 침대를 하나 넣어 준다. 아마 롯지운영은 부업 정도로 아주 가끔씩 오는 트레커들을 상대하는 것 같다. 하지만, 말도 거의 안통함에도 주인은 매우 친절했다.

  4.13. 열하루째(27km)

  역시 지루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 너무 심심해서 일반적인 루트가 아닌 작은 산길로 들어가니 표지판도 거의 없고 길도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곳 주민들은 잘 다니는 것 같은데 초행자가 다니기에는 무리인듯 하다. 들고있던 1:100,000 지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적어도 1:25,000은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나침반도 이상하다. 바늘이 제 멋대로 돈다. 산에는 대부분 철광석이었는데 그게 자기이상의 원인인 것 갈다. 결국 시계와 태양으로 방위 확인하고 대략적인 방향만 잡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1시간 거리라는데 산에만 들어가면 3시간 거리로 변하고, 여튼 재미없는 길.

엄청난 크기의 솔방울. 한국 솔방울 3~4배 크기

  점심부터 조금씩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다. 요의가 자주 느껴지고, 진한 갈색 소변이 아주 조금 나오는 것.. 그래도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 다행이다. 수시로 지퍼를 내리면서 온천이 있는 따또빠니(Tatopani)로 향했다. 간만에 온천에서 때도 밀며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참, 함께 토룽 라를 넘었던 그 많던 트레커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게되었다. 대부분 묵티나트에서 따또빠니까지 별 매력없던 구간은 버스로 이동한 것. 

  4.14. 열이틀째(17km)

  최악의 하루였다. 길은 계속 오르막인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예전 행군할때 경험으로는 어깨가 더 먼저 아팠는데 어깨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보아 무게 때문도 아닌것 같다. 전날 온천에서 목욕한게 문제인가? 몸살기운인듯 하다. 소변색은 더 진해져서 검붉게 보이고 양은 더 적어졌다.

산 속을 헤메이는 중

  허리가 너무 아파서 조금 올라가다 쉬고 바위에 드러눕길 반복하며 오직 정신력으로 Ghorepani(고레빠니, 2,860m)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침대위에 쓰러졌다.

  4.15. 열사흘째(17km)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해가 뜨려 하고 있었다. 롯지 주인아주머니는 숙박비 50루피는 밥을 먹었을때 가격이라면서 전날 저녁식사 왜 안하냐고 뭐라하신다. 푼힐(Poon Hill, 3,193m) 전망대에 에 다녀와서 밥 두그릇 먹겠다고 겨우 달랬다.

  컨디션은 전날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좋지 않다. 푼힐에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소모되었고, 일출을 푼힐에서 보려 했으나 결국 해가 중턱에 뜬 후에 도착했다.

드디어 푼힐이다.

  하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푼힐은 최고의 전망을 선사했기 때문.

푼힐 전망대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바라보는 산이 줌을 당긴 사진이라면 푼힐은 파노라마 사진의 느낌이다.

  마차푸챠레(Machhapuchhre, 6,997m), 강가푸르나(Gangapurna, 7,455m), 힌출리(Hiunchuli, 6,441m), 안나푸르나 남봉(Annapurna South, 7,219m), 안나푸르나 I(Annapurna I, 8,091m), 닐기리(Nilgiri, 7,061m), 담푸스 피크(Dhampus Peak, 6,012m)……. 셀 수도 없는 많은 산들이 나를 반기듯 도열해있다.

안나푸르나 남봉. 왼쪽에는 안나푸르나 I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지나쳤던 모든 산들이 한꺼번에 등장했다. 마치 축구경기 후 선수 한명씩 돌아가며 악수하는 느낌이다. 하나하나 안내판과 모습을 대조해 보면서 한꺼번에 등장한 산들과 인사를 나눴다.

물고기 꼬리를 닮았다는 마차푸챠레(일명 Fish Tail)중앙 Dhaulagiri(8,172m) 우측은 Tukche Peak, 좌측은 Dhaulagiri II~V 좌측 끝은 Gurja Peak

  푼힐을 내려오는 길도 매우 힘들었다. 요통은 덜했지만 내리막 경사가 가파르고 돌계단의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 거의 팔힘으로 내려오다시피 했는데 나중에 보니 대나무 막대의 긑이 5센치가량 닳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포카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나야푸르(Nayapur, 1,070m)에 도착했다.

  트레킹의 마지막 에피소드. 한참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자, 정류소 앞 가게 주인이 Nepali Price로 택시를 구해주겠다며 합승 제안을 했다. 500루피에 택시를 타기로 했는데 문제는 먼저 타고있었던 벨기에 녀석이 자기는 900루피를 냈다면서 기사에게 200루피를 환불하거나 혼자 타고 가겠다는 것.

  계약은 나와 택시기사의 문제다, 먼저 탄 승객이 얼마를 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도의적인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내릴까 생각하는 찰나 택시기사는 200루피를 돌려줬다. 그래도 900루피에 가는것 보다, 두 명 1,200루피가 나으니까.

  벨기에 녀석은 200루피를 받아들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제 필요없다면서 기사에게 200루피를 다시 준다. 그래봤자 2유로, 그에게는 푼돈일 뿐이다. 그래놓고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기 호텔에 먼저 가야 한다, 속도 줄여라 등 계속 궁시렁거리고 있다.

  그는 900루피, 나는 500루피. 시끄러워서 내가 200루피를 그에게 줬다. 예의 상 사양할 줄 알았는데, 그는 200루피를 받아들더니 표정이 환해지며 "You are a fair guy"라는 것. 어이가 없어서 "Every Koreans are fair. 라고 해 줬다. 더 이상 그는 궁시렁거리지 않았고, 심지어는 기사가 실수로 내 숙소에 먼저 내려줬는데 합승했으니 상관없다면서 밝은 표정으로 잘가라는 인사까지 먼저 한다. 2,600원에 사람이 저렇게 변하나?

Besi Shahar에서 Nayapur까지 반 천리길의 기록

  벨기에 녀석과의 작은 헤프닝을 마지막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딩이 끝났다. 포카라에 도착하니 산에서 나를 괴롭히던 통증은 다 사라졌고, 나중에 친구 Dr.서에게 문의한 결과 Rhabdomyolysis(운동유발성 횡문융해증)라는 것. 근육이 파괴되어 신장에 무리가 가고 혈액에 칼륨량이 증가하는 현상으로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운동을 무리하게 하면 생기는 병이고 신장은 허리와 관련이 있어서 요통도 느낀 것이다. 철인 3종 경기 후에 선수들은 혈액에 칼륨농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물론 하산후에 증상이 사라졌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면서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는데, 걱정보다는 어이가 없다.

  대체 운동을 많이 하면 얼마나 했다고, 하루 30km도 안되는 거리에서……. 뭐? Rhabdomyolysis? 한때는 완전무장 메고 하루에 80km을 걷기도 했는데 이게 무슨.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주 한 번 기합빠지더니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냐?

푼힐 전망대에서. Rhabdomyolysis로 인해 표정이 엉망이었다.

  안나푸르나. 돌아보면 기가막힌 경치와 즐거운 경험, 충분한 사색의 시간과, 마지막에는 병주고 약준 곳. 라운딩은 힘 들 때도 있었지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그리고 머릿속에 기억으로만 남은 안나푸르나. 먼 훗날 언젠가 다시 한 번 밟을 수 있을까? 반 천리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이 길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자체에 대한 무한한 감사함과, 주위 수많은 고마운 분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가장 컸다.

  산을 내려오는대로 기념품 가게에 가서 그림엽서를 여러 장 구입했다. 그동안 제대로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분들 중, 주소를 알 수 있는 분들께는 사진으로나마 함께하기 위해 엽서를 부쳤다. 뜻이 조금이나마 전달되려나? 아니면 열심히 일하는데 나 혼자 팔자좋게 놀러다니며 속을 뒤집어놓는게 아닐지 모르겠다?

트레킹 유일한 기념품. 배낭 열때마다 생각나겠지?. 근데 대체 오바로크는 영어로 뭘까?

  이렇게 하여 6박 7일, 12박 13일간의 안나푸르나는 내 삶의 한 페이지에 굵은 한 획을 긋고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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