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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Nepal)

048. 고맙고 즐거웠던 네팔. 그리고 카트만두에서의 데자부

  안나푸르나 라운딩 후 포카라에 틀어박혔다. Rhabdomyolysis(횡문근융해증)를 핑계로 체력 회복이 주 목적이었지만 호수를 낀 아름다운 포카라 자체가 너무 좋았다. 아침이면 해가 뜨면서 멀리 보이는 설산을 붉게 물들이는 곳. 기온도 적당하고 게다가 물가도 싸고 여행용품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인터넷 접속도 원활하니 최고의 휴식처가 아닌가?

  하지만 안타까운건 레이크사이드 근처의 여행자 거리만 벗어나면 다시 가난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림같은 페와 딸 호수

  또한 포카라에서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다. 먼저 7년째 자전거 여행 중이신 '문종성'형님. 형님께 많은 조언도 듣고 정보도 얻었다. 게다가 제육덮밥까지 사주셨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안현철 형님은 네팔 정보가 부족하던 나에게 네팔편 '론니 플래닛' 가이드북을 주셨다. 정말 잘 봤습니다. 또, 책은 카트만두에서 좋은 한국분에게 다시 인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 여행자들끼리 모이기도 하고, 이유진씨 일행을 만나 페와 딸 호수에서 보트도 타고 수영도 했으며, 떠나기 전에는 한국인 식당 '서울 뚝배기' 사모님께서 수정과도 주셨다. 이 얼마만에 맛보는 수정과인지……. 내 티셔츠를 보시더니 전날 한국가신 사장님이 해병대 선배라는데. 조금 빨리 알았으면 이국땅에서 전우모임을 가질 뻔 했다.

  포카라에서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트레킹 퍼밋부터 환전, 식사, 짐 보관, 숙소 등 모든 부분을 도와주신 '산촌 다람쥐'에는 정말 감사한 마음 뿐이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내 각목(개 쫒는 용도)을 보시더니 등산 스틱으로 바꿔주셨다. 

  그러고 보니 포카라에서는 스틱 외에도 몇가지 아이템을 추가했다.

  우선 버너. 여기에는 내 버너에 맞는 막대형 부탄가스(일명 부르스타)는 없고, 나사식으로 된 등산용 가스만 있었다. 마침 저렴하고 가벼운 버너가 있길래 가스(300루피)와 버너(550루피)를 구입했다. 짐이 늘어났지만, 대신 밥과 국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두번째는 긴 바지. 향후 아랍권 국가를 대비하여 긴 바지를 구입했다. 바지 끝이 체인에 걸리는걸 방지하고자 두르던 공사장 각반이 불편하여, 이번 바지는 쫄바지다. 쫄바지는 처음이라 심히 민망하지만 성능이 기대된다. 마지막은 헤드랜턴. 자전거 앞 랙을 달면서부터 가방이 늘 라이트를 가렸는데 헤드랜턴이 저렴하길래 구입.

  포카라에 볼 거리도 많았지만, 꼭 소개하고 싶은 곳은 국제 산악박물관이다. 혹시 포카라에 오게 된다면 꼭 한번 방문을 권한다.

산악박물관 주 전시장

  박물관은 산악지대 소수민족의 모습을 전시한 산지 주민 부스. 히말라야 형성 과정과 각종 화석 동식물과 자연보호를 주제로 한 산 부스. 등반을 위한 장비들과 사용법, 로프 매듭법, 산악 활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악 활동 부스의 크게 세 주제로 나누어져 있었고 야외 전시관도 있었다.

  특히 한국 전시관이 있었다.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밟은 고상돈 대원부터 유명한 엄홍길 대장과 여류 산악인 고미영 대장 등 한국의 산악인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특히 박영석 대장에 대해서는 별도의 부스를 마련해 놓았다. 한국 산악인이 외국에서 기려지고 있었구나…….

최근 개관했다는 한국 전시관

  산악 박물관을 나서면 티벳인 마을이 나타난다. 사실 산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던 티벳인들을 보면서 난민캠프의 열악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갔었다. 직접 본 티벳 마을은 내 기대와 달리 학교도 사원도 세워 놓고, 삶을 일구어 나가는 일반적인 마을이었다. 정착한지 오래 되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많았고, 사전에 갖고있던 고정관념-'나라 잃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사람들일 뿐이었다.

고무줄 놀이 하는 티벳인의 모습 우리와도 비슷한 모습이다.

  유일한 차이점은 네팔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티벳인의 문화와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다시 티벳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한쪽에서는 티벳 독립운동을 하며 분신자살을 하기도 한다는데, 우리도 36년간의 식민지 시절을 겪지 않았나? 하루빨리 티벳인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본다.

  그리고, 어느새 네팔에서의 비자 만료일이 다가왔고, 결국 잠깐 발만 담궈 보려던 네팔은 정이 흠뻑 들어서 다시 한 번 비자 연장까지 하면서 머무르게 되었다.

  4월 25일. 드디어 오랫동안 머물렀던 포카라를 떠났다. 이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가는 길. 약 200여 km이다. 길은 엄청난 오르막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지도 상으로도 오늘 목적지인 둠레(Dumre)라는 마을까지는 난코스는 거의 없어 보인다.

차 바퀴가 가려 보이면? 15세기에는 이런걸 보며 지구가 둥근 걸 발견했지만 나는 이럴때 희망을 발견한다.

   오랜만에 제대로 달리는 Wing도 신난는지 씽씽 달리고 있다. 어느 새 둠레 부근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지려면 두어 시간 남았고, 아예 좋다고 추천받은 반디푸르(Bandipur)에 가 보기로 했다. 가이드북도 관광개발의 마수에서 벗어난 편안한 휴식처로 권하고 있었다.

삽질이 힘든지 끈을 묶어 2명이 함께한다. 하긴 저렇 어린 소년들이.

  그리고 반디푸르. 아. 이 코스는 정말 최악이었다. 오르막을 예상 못한것도 아니었고, 거리는 5km정도니 힘들면 걸어도 한시간 반이라는 생각에 출발했으나 난이도는 그 이상이었다.

  자전거 타는것은 물론 끌고 가려해도 짐의 무게때문에 뒤로 밀려버리는 길. 한걸음 한걸음이 너무나 힘들다. 약 5km 거리에서 고도는 700m정도 높아지니까 $$ \tan{\theta} = \frac{700}{5000} \approx \frac{1}{7} \\ \therefore \theta = \tan^{-1} {\frac{1}{7}} $$ 이니까 지금 올라가는 경사각 θ는 몇도일까?

  스칼라량인 이동 거리는 5km이지만 다시 내려오면 벡터인 변위는 0km이야. 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는거야. 이상한 생각만 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올라갔다.

오르막 또 오르막. 산 중턱이지만 아직도 멀었다.

  룸비니에서 포카라까지 가는 코스는 오르막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진을 빼놓았지만, 이번 코스는 짧은 구간이 집중적으로 힘들다. 아마 기울기 자체는 지금까지 달린 코스 중 최고일듯 하다. 결국 5km가량의 구간을 2시간 반에 걸쳐 자전거를 타다 끌다 쉬다 반복하며 올랐다.

  마침내 도착한 반디푸르. 반디푸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축제로 인해 방값도 배가 되어 있었고,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무슨 축제인지 사람만 많고 볼거리는 전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둠레에 있는건데, 후회가 밀려온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장 저렴한 500루피짜리 도미토리에 몸을 맡겼다.(주행거리 78.24km / 누적거리 2,944km) 

반디푸르의 소년

  눈은 떴으나 전날 피로로 계속 침대에서 뒹굴다 일어나서 마을을 한바퀴 돌아봤다. 물론 반디푸르는 아름다운 마을이지만, 이렇게 시끄러운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더 이상 머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전날의 엄청난 오르막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브레이크를 손보고 다시 출발.

아름다웠던 반디푸르의 골목길

  와. 브레이크에서 손을 떼지 않고 가는데도 시속 40km이 넘는 경사, 게다가 꼬불꼬불한 길때문에 함부로 속도를 내다가는 바로 낭떠리지에 쳐박힐 것 같다. 마음껏 달릴 수 없으면 내리막길도 스트레스다.

계속 반복되는 급경사. 저 길을 내려간다.

  오늘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 그래도 고도는 계속 400m 근처다. 카트만두는 해발 1,200m가 넘는데 대체 언제 갈지. 또 반디푸르처럼 한번 힘들고 끝나려나?

  중간에 공터와 오아시스같은 약수터(?)를 발견, 샤워도 하고, 라면도 끓여먹고 한참을 쉬었다. 몸은 여기서 이만 쉬자하고, 머리는 아직 해도 안졌으니 지금 쉬면 내일 더 힘드니 조금 더 가자고 한다. 나는 머리의 판단을 따랐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므로. 그리고, 노잣돈이 다 떨어져 가기 때문.

  돈 좀 찾아 놓을 걸 그랬다. 돈이 있지만 야영하는것과 없어서 야영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 길에서 돈마저 떨어지면 정말 초조해진다.

카트만두 100km밖에 안남았다. 근데 언제부터 100km에 '밖에'라는 단어를 썼지?

  15km가량 더 가니 공사중인 학교가 보인다. 직감적으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숙소는 바로 여기

  그런데 학교로 들어가려면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일단 바로 앞의 가게에서 음료와 국거리를 샀다.

  가게 주인과 말이 안통하는데, 딸 Sujita Arikari가 도와줬다. 영어도 잘 하고, 여러가지를 묻기도 하고 알려주기도 했다. 밥을 하는데 사람들이 몰려든다. 수지따는 이런저런 통역도 하면서 나에 대해서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못자겠다 싶은데 신기하게 밥을 먹으려니 그 만던 사람들이 사라진다. 여기도 한국처럼 밥먹는것을 쳐다보는게 실례인가 보다.

친절한 수지따와 동생

  식사를 끝내는데 주민들이 2층에 자리를 잡아 준 것. 사람들 다 아는데 여기서 자도 되나? 망설이는데 한 친구의 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자라. 여기 네팔이다.'

  말만으로도 참 고마운데, 더 이상한 일은 내 텐트 옆에 조금 떨어져서 한 명이 자리를 깔았다. 동네 주민인데, 집도 있으면서 왜 여기서 자려고 할까? 물어 봤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수지따에게 물어보니 그냥 웃으면서 친구 하라고만 한다. 모를 일이다. 이날 밤은 정말 더웠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텐트 옆의 친구도 자지 않고,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열대야 때문에 나와서 자려는건가? 결국 2시가 넘도록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Bareni 근교, 주행거리 87.47km, 누적거리 3,032km)

  눈을 떠 보니 옆에서 자던 친구는 없어졌다. 수지따에게 물어봤지만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다.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마을 주민들이 불침번 선 거야?

휴일(토요일이 휴일)을 맞아 게임을 하는 중.

  고마웠던 Bareni에서의 좋은 기억을 뒤로 한 채 카트만두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오늘도 계속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고도는 그다지 높아지지 않는다.

  좌측편 계곡이 여긴 그다지 높지 않다고 격려하는 듯 했다. 그런데 계곡 건너편에 줄이 보인다. 뭐지? 가 보니 케이블카. 수동 케이블카다. 끌어보니 상당한 난이도다.  

수동 케이블카유격 훈련하나? 외줄타는 모습

  그리고, 결국 나타난 마의 고지. 수 km내에서 순식간에 1,520 고지를 넘는 코스였다. 뭐 다른 생각은 안들었다. 그냥 힘들다. 도무지 생수만 몇 병을 사서 마신건지 모르겠다. 땀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입안이 짭짤하다. 전날 반디푸르가는 길에는 못미치지만 정말 힘든 길이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고지 위에는 어이없게도 경찰 초소가 있었다. 아래로는 카트만두 시내가 훤히 보인다. 드디어 올라온 것이다.

드디어 내려다보이는 카트만두

  땀에 흥건히 젖었고, 쉴때마다 마르기를 반복하여 하얗게 얼룩이 져 있는 티셔츠. 이 땀은 인내의 상징이다. 이게 다 내 경험이고 무형의 자산이겠지. 흐뭇하다.

소금으로 얼룩진 티셔츠

  기분은 토룽 라에 올랐을때보다 더 좋다. 아마, 자전거로 다닐 최고 고도가 아닐까? 기쁜 마음으로 정상에서 기념촬영도 하고, 잠시 쉰 후 다시 출발. 내려가는 길은 순식간이다.

정상에서 기념촬영

  그런데……. 대체 이게 뭘까. 룸비니와 포카라의 깨끗하고, 평화롭던 네팔은 어디가고. 파손된 도로와 시끄러운 거리, 울려대는 경적소리. 길거리의 쓰레기와 날리는 흙먼지. 낯설면서도 뭔지 익숙한 이 기분은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데자부? 그래 이건 인도다. 딱, 인도의 그 느낌이다. 차라리 포카라에 더 있을걸 그랬나?

  약간의 후회를 하며 저렴한 숙소가 많다는 타멜 거리로 이동하여 숙소를 잡았다. 놀랍게도 여기서 포카라에서 만났던 노종욱 형님을 만났다. 더 신기한건 형님은 내가 마지막 고지를 넘을 때 버스에서 보셨다는 것. 상당히 안쓰러웠다는데……. 이왕이면 정상이나 좀 멋지게 있을때 보시지. 

  형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좋은 시간을 갖고(식사 감사합니다)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주행거리 55.64km, 누적거리 3,08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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