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아잔타를 출발했다. 뜻하지 않게 아잔타에서 2박이나 하면서 계획한 일정은 더 늦어져 버렸다. '시간을 만회하려면 최대한 빨리 가야겠군. 100km은 가야겠어'
그러나 발걸음은 생각만큼 빠르지 않다. 아잔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도로 상태가 열악해진다. 어떤 구간은 마치, 아스팔트를 살포만 하고, 롤러로 밀지 않은 듯 하다.동네 꼬마도-학생들도-어른들도 나를 신기하게 구경한다. 어라? 트럭기사도 전방주시 안하고 나를 보네
경적소리와 소음과는 반대로 주위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달리다 보니 철도 건널목도 나오고.기차가 운행하지 않을때는 깃발을 쳐놓는다. 은근히 귀찮은 작업일 듯 하다.
물을 구하기 위해 펌프질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난, 꼭지만 돌리면 아니 요즘은 돌리는것도 별로 없지. 누르기만 하면 뜨거운 물 까지 나오는데도 불평 투성이었는데.열심히 펌프질 한 결과 물이 나온다. 막 일손을 놓으신 아주머니
어느 새 정오가 지났다. Jamner라는 마을을 지나자 평화로운 풍경이 이어진다. 난 이렇게 좁은 길 사이로 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광경을 보면 아주 어릴때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와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곳이 인상에 남았나 보다. 주변 풍경이 너무나 편안하여 사진을 한장 찍었다. 인도에는 나무마다 저런 표시를 해놓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잠깐 쉬다 출발하려는데 조금 떨어진 농장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또 걸렸구나. 빨리 가야겠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고 가려는데 이리 오라는 신호 같다. 모른척 하고 가려니 소리까지 지르며 계속 오라고 한다.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Farm House라는 농장이었는데, 들어가기가 무섭게 평상을 깔아주더니 물과 음식을 한접시 준다. 어릴 때 많이 먹었던 쌀 튀김과, 토마토, 이름모를 채소였다.오랜만에 보는 쌀 튀김.
갈 길이 멀기에 잽싸게 한접시 비우고 가려는데 더 있으라고 한다. 중식시간이라고, '지금 먹은게 간식이었나?' 염치불구하고 조금 더 머무르기로 했다. 마침 가족 중 한명은 영어가 가능하여 약간의 대화가 가능했다. Sunil Jaudary씨 가족
Jaudary씨는 집에 있는것 처럼 편안하게 해주었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하고 자전거 기어를 건드리던 다른 인도인들과는 다르게, 아이들도 내 자전거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찬찬히 살펴 보니, 할아버지는 손자와 놀아주고, 어른들은 일을 한다. 남자아이는 부모를 도와 장작이나 나뭇가지 등을 모아오고, 여자아이는 동생을 돌본다. 할머니와 며느리는 요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방에서 일하시느라 격주에 한번씩만 집에 오셨고, 집에서는 피곤하여 쉬기만 하셨다. 어머니도 일하시며 늦게 들어오셨다. 나도 나름대로 돌아다닌다고 동생을 챙긴적도 없고, 대학교 진학하면서부터는 거의 10년간 집을 비웠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중심은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선후배들로 바뀌어 있었다.
나에게 집은 크게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자꾸 밖으로 나돌아다닌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께 반항도 많이 했고,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뿐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반평생을 헌신하셨는데, 난 아무것도 못해드렸다. 또 내가 부모님의 인생과 젊음을 모두 빼았았다는 생각, 내가 아버지의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대해 두려움을 포함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이유가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경상도 분인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내가 말을 많이 하면 남자가 수다스럽다고 꾸짖으셨고, 난 지금도 아버지와 몇마디 해본 기억이 드물다. 전화 통화하면 늘.
"괜찮냐?"
"네, 잘 지냅니다. 별일 없으십니까?"
"그래. 알았다". -뚝
이제는 할 말이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경험도, 가치관도, 모든 게 달라져서 간극은 넓어져만 간다. 그 고생하시면서 나를 지금까지 키워주신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감사하고, 또 늘 죄송하지만 친하지는 않다.(군 입대 후, 휴가 중 아버지께 약주를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할 말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것은 건강을 생각해서 빈 잔에 조금씩 덜채우면서 술을 따라드리는 것 뿐. 이제는 조금은. 남자가 수다스러워 져도 될 것 같은데.) 그래서일까. Jaudary씨 가족과의 시간은 꿈결같았다.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이서만 여행한 기억, 국민학교 1학년때로 기억한다. 아버지와 봉화 할머니댁에 간 적이 있었다. 80년대 말의 봉화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기분이었다.
가스렌지 하나 없이, 벽돌을 쌓고 마른 나무를 때면서도 즐거운 가족. 이들에게 '고부갈등'은 먼 나라 한국의 드라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시어머니는 콩을 볶고, 큰며느리는 밀가루 반죽을 준비하고, 작은 며느리는 불을 지핀다.
요리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막 지루해지려던 찰나, 유일하게 영어가 되는 Shocikh Sufiyan이 부른다. 따가가 보니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20미터는 될 듯. 굉장히 깊었다. 주위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돌무더기는 우물에서 퍼낸 것이라고 한다.
아, 이제 의문 하나가 풀렸다. 비가 오지 않아 얕은 강이 말라버릴 정도의 건기에 대체 어디서 물을 구한 건지. 물을 찾기위해 파고 파들어간게 이렇게 깊어졌구나. 여기서 얻어마신 물 몇컵. 나는 또 배가 아플까봐 입만 갖다대고 내려놨는데, 이건 15루피짜리 생수보다 훨씬 귀한 물이었구나.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과, 미니 크레인같은 두레박
그냥 내 자신이 부끄럽다. '난 생수 아니면 못마실 만큼 청결하고 잘난 놈인가?' 권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다 사람 먹는 물인데, 마시고 마시다 보면 면역력이 생기겠지……' 갑자기 물을 막 마시니 놀란 표정이다. 많이 목마른줄 알고 물을 더준다. 바로 한컵 더 마셨다. 미지근했지만 물 맛이 참 좋았다.짜빠띠를 만드시는 아주머니
보여주는 염소도 보고, 밭도 보고 나니 마침내 식사가 완성되었다. 손님 왔다고 특식을 준비했나보다. 한참 걸려서 나온 식사는 진수성찬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보니 벌써 15시가 넘어 있었다. 떠나기가 아쉽지만 이제 가야한다.
이들은 그냥 멀리서 나를 보고 아무 조건없이 베풀어주었다. 나도 뭔가를 주고 싶었지만 마땅한게 없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좀 더 크고, 영어를 배우고 혹시 한국에 온다면, 내가 조금이나마 도와줄 수 있겠지. 비자신청할때 초청장을 써 주던, 주말에 한국의 곳곳을 보여주던.
징표로 삼기 위해 갖고 있던 칼을 부러뜨려 반토막을 주고 왔다면, 동명성왕이 되겠지? 노트 한장에 고맙다는 인사와 연락처를 적어 주고 돌아섰다. 나에게 이들과의 만남이 잊지못할 추억이듯. 이 어린이들도 말 한마디 안통하던 외국인과의 만남이 좋은 추억이 될까? 만에 하나 한국을 기억한다면 언젠가 한국을 찾을 수도 있겠지?Jaudary씨 가족의 모습. 아버지가 요리 거드는 모습이 낯설다.
Jaudary 씨의 집에서 머물고 나오니 꿈을 꾼 것 처럼 멍한 기분이다. 약 3시간 전에도 나는 이 길에 서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배가 부른걸 보니 꿈은 아니다.
달리는 도중 계속 Jaudary씨의 친근한 미소와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 후배 중 한명이 자기 꿈은 '좋은 아빠 되기'라는 말을 해서 웃어넘긴 적이 있다. 그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난 많이 가졌지만, 더 중요한것을 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에 돌아와서 파랑새를 발견한 치르치르처럼 나도 집에 돌아가서야 만족을 할지도 모르겠다. 집에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받으신다. 여전히 대화는 길지 않다. 건강히 잘 지낸다는 안부만 전하고 끊었다.
달리다 보니 삼거리가 나오고, 이 지점에서 드디어 1,000km을 돌파했다. 국내에서 길들인 거리까지, Wing은 2,000km째 달리고 있다. Odometer는 1000을 찍었고, 대체 이 표시판은 어디로 가라는 뜻인가?
그리고, Bodwad라는 곳을 막 지나, 괜찮은 공간을 발견, 조금 일찍 숙영을 준비했다.(주행거리 63.08km, 누적거리 1,008km.) 어쩐지 더 달리는것보다, 오늘 일을 다시 떠올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주위에 터진 수도관이 있었서 샤워까지 할 수 있었다. 여행 시작 후, 최고 행운의 하루였다.정말 고마웠던 마침 터져 준 수도관내 쉴 곳은 내 집 뿐.
'인도(Ind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021. 선택의 기로에 서다. 그리고 스콧과 섀클턴 (4) | 2013.01.26 |
---|---|
020. Madhya Pradesh주 진입! (6) | 2013.01.25 |
018. 스포크는 부러지고, 배는 아프고 (1) | 2013.01.22 |
017. 신을 경배하는 인간의 위대함. 엘로라 (2) | 2013.01.21 |
016. 동네 스타와 인도 양아치 (6) | 2013.01.14 |